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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아나키 집대성자 프루동

My Text/아나키즘

by 아나키안 2005.10.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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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동 Proudhon, Pierre-Joseph 1809~1865


프랑스의 가난한 선술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목동으로 보냈다. 그에게 이상사회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수공업자나 농민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뜻한다. 총명했던 그는 브장송에 있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해 부유한 상인 아이들로부터 가난뱅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집안의 경제적 파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인쇄 견습공이 되었지만 향학열을 식지 않았다. 그는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라이어를 독학하는 한편 여러 지역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과 사상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1838년 브장송 아카데미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최초의 저서 '재산이란 무엇인가? (1840)를 발표해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 여기서 프루동은 '나는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산은 도둑질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재산은 일반적인 의미의 재산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해 취득한 재산이었다. 반면에 다른 의미의 재산, 즉 농부가 자기가 일할 토지를 소유할 권리나 장인이 도구나 작업장을 소유할 권리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프루동이 공산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공산주의가 개인으로부터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자유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42년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후속편인 '소유자에 대한 경고'를 출간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판사가 그의 주장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유죄를 모면했다. 1843년 프루동은 리옹과 파리를 방문해, 카를 마르크스와 미하일 바쿠닌 같은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프루동은 곧 마르크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프루동이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1846) 를 발표하자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1847)으로 프루동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 간의 역사적 대립의 시작이었다.


1848년 초, 파리로 가서 '인민의 대표자'를 비롯해 모두 네 종류의 신문을 편집했는데, 네 신문 모두 정부의 검열에 의해 차례로 폐간되었다. 프루동은 1848년 혁명기에 정치투쟁에 나섰다가 제2공화정의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을 비판한 죄로 1852년까지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신문을 편집했고, '혁명가의 고백'(1849), '19세기의 혁명관'(1851) 등의 주요 저서를 집필했다.


1852년에 석방된 프루동은 경찰의 항상적인 감시 때문에 활동하기가 어려웠으나 1858년에 '혁명과 교회에서의 정의를 위하여'(3권)를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모두 몰수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벨기에로 망명한 후 열린 궐석재판에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1862년에 파리로 돌아온 뒤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상호부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파리의 수공업자들은 1865년 그가 죽기 직전에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의 주된 세력이 되었다. 프루동의 마지막 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대하여'(1865)는 그의 임종 직전에 완성되었다. 그는 이책에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라고 주장했다.


프루동 이전에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 등이 아나키즘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아나키즘(정부 없는 사회), 상호부조주의(신용은행 설립을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 연방주의(중앙집중주의적 정치 조직의 부정) 같은 사상은 프랑스 혁명사상을 개인적 경험으로 재해석한 결과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루동은 자기가 하나의 사상체계를 정립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을 건설하려는 사상을 혐오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후에 그를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바쿠닌과 러시아의 작가 페테르 크로포트킨이 발전시킨 아나키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러시아의 인민주의, 1860년대 이탈리아의 급진 민족주의, 1870년대 스페인의 연방주의, 프랑스에서 발전하여 나중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큰 세력을 형성한 생디칼리슴 등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초까지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용: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웅진닷컴, 2001, pp1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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