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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영원한 반항아 바쿠닌

My Text/아나키즘

by 아나키안 2005.10.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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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


바쿠닌은 러시아의 트베리(지금의 칼리닌) 지방 소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목가적인 전원생활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바쿠닌은 1840년에 독일로 떠나 청년 헤겔 학파에 매료되었다. 러시아 정부 의 귀환명령을 거부해 여권을 회수당한 바쿠닌은 프랑스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프루동, 마르크스 등 당대의 저명한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과 슬라브 민족해방운동의 연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바쿠닌은 1848년 2월 혁명 동안 정치 투쟁에 동참한 후 독일의 한 지방에 은거하면서 최초의 혁명강령 선언인 [슬라브 민족에 고함 Aufruf an die Slaven]을 작성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소멸해 가는 반혁명세력으로 간주한 그는 이 책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복시켜 중부 유럽에 슬라브 민족의 자유연방을 결성할 것을 촉구했다. 바쿠닌은 농민계층, 특히 무력저항의 전통을 지닌 러시아의 농민계층을 다시 다가올 혁명의 중추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소극적인 도피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봉기를 주도했으나 검거당해 러시아 정부에 인도되었다. 1851년 5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요새에 유폐된 바쿠닌은 이 곳에서 [고백록Confession]을 집필했다. 1857년, 마침내 석방된 그는 영국을 거쳐 이탈리아로 갔다. 이 곳에서 그는 평생을 헌신하게 되는 아나키즘 원칙들을 정립했으며, 다양한 비밀 결사들로부터 일부는 실제이고 일부는 가공적인 혁명조직망을 조직하기도 했다.


바쿠닌의 만년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은 카를 마르크스와의 이념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에 정착해 있던 그는 제1인터내셔널 즉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는데 그 내부에 비밀혁명전위대인 '사회민주주의 동맹'을 둠으로써 인터내셔널 내부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바쿠닌과 마르크스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거물 사이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 대립은 결국 1872년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주의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그러나 양 세력 사이의 불화는 향후 여러 해 동안 유럽의 혁명운동을 분열시켰다.


바쿠닌이 저술한 '압제의 제국 독일과 사회혁명 L' Empire Knouto-germanique et la revolution sociale'(1871) 및 '아나키즘 사회 Staat en anarchie'(1873)는 마르크스와의 논쟁을 다룬 것들이다. 폭력을 통한 기존 질서의 파괴를 역설했던 바쿠닌은 정치적인 통제, 중앙집권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과 같은 마르크스의 원칙들을 거부하고 러시아 농민계층에 구현된 저항의식을 내세웠다. 바쿠닌의 아니키즘은 이처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대립명제로서 비로소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궁핍한 말년을 보내던 바쿠닌은 건강이 약화되어 친구들의 보조금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러한 형편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나키즘의 신념이 약화된 적은 결코 없었다.


바쿠닌은 프루동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즘의 주창자로 평가되고 있다. 논리적인 이론체계가 마련된 것도 아니고 의욕에 찬 방대한 저술들은 미완성인 경우가 많았지만 바쿠닌의 명성과 매력은 유럽 곳곳에 숱한 추종세력을 형성시켰다. 영국, 스위스, 독일에 적은 수이지만 아나키즘 조직이 구축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들이 세력을 과시했다. 이탈리아 및 스페인에도 바쿠닌주의적 무정부주의 운동은 계속 융성했으며, 특히 1936년까지 스페인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바쿠닌의 후예들이었다.


인용: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pp1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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