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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크로포트킨에 관하여

My Text/아나키즘

by 아나키안 2005.10.12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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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Peter kropotkin 1842~1921


러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크로포트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수습기자단에서 교육을 받았다. 1년 동안 알렉산드르 2세의 부관으로 근무했으며, 1862~67년에는 육군 장교로 시베리아에 배속되었다. 그 때 그는 군무 이외에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지리학적 탐사활동에 열중하는 학자적 자질을 보였다. 이 때 구상한 산맥구조선 이론과 빙하시대에 관한 연구는 그에게 과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1871년 러시아 지리학회의 회장직은 물론 귀족세습권까지 포기하고 사회정의 실현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872년에 그는 스위스 쥐라산맥의 시계제조업자들을 방문했는데, 그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결사체에 감탄하여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혁명단체에 가입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노동자, 농민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다가 1857년에 투옥되었으나 2년후 극적으로 탈출하여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몇 년동안 스위스에서 지내던 그는 1881년 알렉산드로2세가 암살당한 후 러시아 정부의 요구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었다.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폭동을 주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1886년에 석방된 후 30년 동안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장기간의 망명생활 동안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자유주의적 철학을 피력한 영향력 있는 저서들을 집필했다. '어느 반항자의 이야기'(1885), '러시아와 프랑스의 감옥에서'(1887), '빵의 정복'(1892),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1899), '상호부조'(1902), '러시아 문학'(1905), '1789~93년의 프랑스 대혁명'(1909) 등이 그것이다.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상호부조'에서 그는 종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윈의 주장처럼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지배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창조적인 기능을 개발할 수 있는 지방분권적, 비정치적, 협동적 사회로 복귀를 지향하는 것이 현대사의 추세라고 믿었다.


청소년 교육을 강조한 그는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골고루 개발시키는 '통합교육'을 실시하여 균형 잡힌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수학과 과학의 기본원리와 인문학의 학습을 중요시하면서 야외교육을 통한 실험관찰 학습을 강조했다. 이러한 방법은 현대의 교육 이론가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자기가 직접 겪은 형무소 생활을 토대로 형벌제도의 철저한 수정을 주창하기도 했다.


크로포트킨은 과학자와 윤리학자의 자질에다 혁명조직가와 선전가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애로운 마음의 소유자였으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는 폭력의 사용과 폭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의 아나키즘 운동을 창시했고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의 아나키즘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전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연합국을 지지했는데, 이것이 그에게서 많은 동지를 떠나게 했다. 이유야 어쨌든 그의 연합국 지지는 아나키즘의 반군사적인 전통을 위배한 처사였다. 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 그가 거의 반세게에 걸쳐 구축했던 운동이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사태는 호전되었다. 75세의 고령인 크로포트킨은 1917년 6월 망명한 지 40년만에 페트로크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17년에 그가 국가 없는 사회의 토대가 될 것으로 생각한 코뮌과 소비에트 병사, 노동자 위원회가 자발적으로 구성되자 자유주의적 미래에 대한 그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감격은 곧 비통으로 바뀌었다. 그는 친구에게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말했는데, 혁명이 자유주의적 방법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이류를 볼셰비키가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년을 윤리학사 집필에 몰두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1921년 모스크바 근처에서 죽었다.


수만 명의 추종자가 참가한 그의 장례식은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러시아의 수도를 누빈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그는 높은 윤리적 수준과 자기 절제로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니키즘을 "단검과 폭탄에 불과하다"라고 매도한 사람들에게도 찬탄을 받았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그만이 톨스토이가 주창했던 삶을 살았다고 말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진정 행복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크로포트킨이라고 말했다.


☆☆출처: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pp1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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