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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도그마에 빠진 함익병 원장의 철인정치

My Text/Essay

by 아나키안 2014.03.1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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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병 원장의 담론, 나름 의미는 있었다


나는 <월간 조선>에서 함익병 원장이 일부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처럼 구라를 치거나 위선적인 작태를 보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솔직하게 내뱉은 생각이 본의 아니게 심각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나름대로 의미 있는 화두도 던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솔직한 멘트가 모두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병자의 솔직한 넋두리를 굳이 정색하고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함 원장이 미친놈이라는 말은 아니다. 국가, 민주정치, 자유와 평등 등 가장 원론적이지만 막상 토론하려면 쉽지 않은 주제들을 풀세트로 차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혹독한 민주화 투쟁을 거론하며 함 원장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죄인 취급하는 것은 더더욱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안철수를 비롯한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에 맞장구를 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개인 소견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는 자기 돈으로 해야 깨끗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누가 굳이 반대하겠는가?


다만, 그의 독서에는 약간의 의심이…


<백년손님- 자기야>라는 TV프로그램에 출현해 재미있는 캐릭터를 보여줘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인기를 누린 그에 대한 최근 인터넷에서의 뜨거운 논쟁을 보며 전반적으로 든 생각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학, 철학, 토론수업을 비롯해 교양 함양을 위한 제대로 된 독서가 절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는 것. 


김훈 소설을 좋아하며 요즘은 <당태종 평전>을 읽고 있다는 그의 독서량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균형 된 독서는 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한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알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인간적인 삶에 대해선 성찰하진 않았을 거라고 감히 추론한다.


제대로 배운 철학자(철인)의 기준은 누가 판단?


“독재가 왜 잘못된 건가요? 플라톤도 독재를 주장했습니다. 이름이 좋아 철인정치지, 제대로 배운 철학자가 혼자 지배하는 것, 바로 1인 독재입니다. 오죽하면 플라톤이 중우(衆愚)정치를 비판했겠습니까.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인 페리클레스(Pericles) 시대도 20년을 넘겼습니다. 독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하나의 도그마(dogma)입니다.” <‘월간 조선’ 인용>


플라톤이 독재를 주장했다고 독재정치도 진리, 선(善)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이른바 권위 있는 지식인이나 종교인의 언급을 인용해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는 자기합리화의 일종으로 분석한다. 문제는 그 본질적 권위마저 상당수가 비판한다면 그에 기댄 주장 자체도 설득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 


특히, 함 원장의 주장은 독재를 효율적인 정치로,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 제도는 독재정치에 비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민주주의 꽃이라 하는 선거를 보더라도 민주주의는 대체로 돈과 정열이 많이 소비된다. 사실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선거연령 18세 이상 조정안 반대나 세금 낸 사람만 투표하자는 주장 자체도 필요 없다. 막말로 선거 안하고 독재자가 국회의원부터 시장, 구청장 등을 지정하면 그만이다.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가 경제발전 운운하며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를 편 것은 박정희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아까워 영화도 보지 않는다는 함 원장에게 민주주의의 시끌벅적한 축제 한마당을 느껴보라는 건 무리한 요구인가? 


그의 논법은 도그마를 비판하면서 또 다른 도그마에 갇혀 버린 형국으로 보인다. 도그마라는 개념 자체가 독단적인 신념을 뜻한다는 점에서 독재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다른 존재(사상, 이념)의 참여를 원천봉쇄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의 다양성, 사상의 존중, 표현의 존중 차원에서 독재정치를 지지하는 의견마저 존중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악용이다. 민주주의는 독재를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민주와 독재는 태생적으로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의 논법을 똑같이 동성애 문제에 차용할 수 있다. 이른바 플라토닉 사랑은 원래 플라톤의 동성애에서 유래한다. “플라톤도 동성애를 찬양했습니다. 이름이 좋아 플라토닉 사랑이지 이성애처럼 맘에 맞는 동성끼리 즐기는 숭고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성애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 그의 독재 합리화는 궁색하게 보인다.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에서 이데아의 세계인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가운데 왼쪽)보다 현실세계를 상징하는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음에 와 닿는다. 손에 잡히지 않는 완벽한 본질(절대선), 영원성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현실을 망각해버리지 않을까. 절대, 영원, 완벽, 순수, 지고지순, 질서라는 말들은 독재자들도 자주 내뱉는 정치수사이다.  물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바로 앞에서 삐딱한 포즈로 자빠져 책을 읽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더 선호하지만...


철인정치가 귀족, 군인, 평민, 노예 등 고대 아테네의 계급사회를 전제로 한 정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부르주아의 등장과 함께 사회계약론을 근거로 탄생한 근대국가론과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 같다. 노예제에 기반한 독재정치, 철인정치를 흠모하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 헌법이념을 부정하는 반역이라고 확대 해석하고 싶진 않지만, 니체의 초인이론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히틀러나 플라톤 철인정치를 독재정치의 정당화 도구로 이용하는 함 원장의 논리나 별반 다름없어 보인다. 


더구나 철인정치는 함 원장처럼 똑똑하고 머리 놓은 사람(엘리트)이 독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현상을 초월하는 이데아를 인지하는 자를 가리키는데 그건 또 누가 판단하는가? 요컨대,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공자의 덕치만큼이나 현실에서 절대 실현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데아일 뿐이다. 


과신오류가 빚어낸 독재 찬양


“민주정치도 오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지고지선(至高至善)이 아니듯,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1960년대부터 민주화했다면, 이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이 발언은 마치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며 잘 먹고 잘사는 게 우선이라는 어르신들의 비아냥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민주주의는 밥 먹여 준다. 독재보다 먹을거리가 많다. 그나마 군사독재가 그 정도에 끝나기에 한국사회가 이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이 운전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럼에도 교통사고는 무지 많이 발생한다. 독재자는 자기가 그 누구보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자아도취, 안하무인 정치가 독재다. 자아도취가 심해지면 독단이 되고 광기로 발전한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높이 평가하면서 타인은 평가절하 하는 일명 ‘과신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만 잘났다며 부하 직원 무시하는 직장상사나 본인만 제대로 된 정치를 한다는 독재자나 똑같다. 과신하는 직장상사 밑에선 부하들이 고달프지만, 과신하는 독재자 밑에선 온 국민들이 피곤하다.


<월간 조선>에 나온 한 줌도 안되는 피쳐기사 몇 줄로 함익병 원장의 가치관, 철학 전체를 단정 지을 순 없다. 좀 더 지켜볼 필요성과 기회 부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떼거리로 달려들어 인신공격성이 강한 극단적인 단어들을 남발하는 숙청작업, 테러행위는 썩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게 있다면 최소한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직업군에 있는 사람이라면(의사가 지도층이 아니라고 항변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조금이나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신촌에서 미용 피부과를 개원한 그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준 고객은 대부분 군대도 안가고 세금도 그다지 많이 내지 않았을 젊은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독재정치, 박정희 정권 옹호론이 아닌 그의 주고객이었던 여성들의 문제를 비롯한 청년층,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 등에 대해 소신발언했다면 그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교육문제를 제외하고 이러한 질문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터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고대 아테네 공화정은 밑바닥에서 개고생한 노예들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다. 함 원장이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개고생하는 비정규직, 실업-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제 취약계층, 여성들, 힘없는 사람들을 아테네의 노예처럼 바라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월간조선 기사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40310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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