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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Fuc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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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키안 2014. 3. 21.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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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 2013)

○ 감독: 조엘 코엔, 에단 코엔

반복되는 ‘어긋남’은 가위눌림 같은 지금 여기의 현실

<인사이드 르윈>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어긋남’.

뭔가 부지런히 시도하는데 묘하게도 자꾸만 어긋나는 빌어먹을 운명을 짊어진 자들은 대체로 ‘희망→분노→또 희망→슬픔→또 희망→포기’라는 절망의 순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하게 되는 것 같다. 유일한 희망이자 존재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던 르윈의 기타마저 거추장스런 짐짝처럼 느껴질 정도로 몹시 힘겨워 보인다. 


단출한 클럽에서 포크음악을 하는 밑바닥 인생, 이른바 루저(loser)라 칭할 수 있는 ‘르윈 데이비스’(배우: 오스카 아이삭)는 ‘전환 인생의 논리’에 의해 나름대로 과감한 도전을 감행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원래 있던 그 자리로 회귀한다. 르윈의 지리멸렬한 인생을 이입한 것 마냥, 심지어 함께 다녔던 고양이마저 처음 있던 고양이와는 전혀 다른 놈인데도 시종일관 똑같아 보인다. 뭔가 다른 길이었던 같은데 원하지 않은 ‘데자뷰’를 반복 체험하는 더러운 느낌이라고 할까.

르윈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탱고를 인용하며 진지한 담론을 꺼내보지만 포크스럽지 않게 자꾸 "Fuck You"라고 욕을 해대는 진 버키(배우: 캐리 멀리건)의 저주는 보다 빨리 더 멀리 달리고자 전력을 다해도 제자리를 맴도는 가위눌림 같은 현실에 대한 분노, 발버둥처럼 들렸다. 자꾸 어긋남을 당하다 보면 요행으로 좋은 길을 마주칠 만도 한데 항상 추운 날씨에 코트도 없이 진창길을 걷게 된다. 한마디로 Fuck You러운 어긋남이다. 이쯤 되면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가 아니라 ‘그냥 Fuck You지요’라고 해야 할 듯하다.



최근 대한민국 국회 홍보기획관실에서 영화 <인사이드 르윈>을 선착순으로 관람예약을 받는다는 공고를 보고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국회의원회관 회의실에서 보는 <인사이드 르윈>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니 이 역시도 몹시 어긋나 보이는 것은 현실을 삐딱하게 보는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인가? ‘기타 하나, 고양이 한마리… 뉴욕의 겨울을 노래한다’는 한국버전의 메인포스터 문구가 “무명가수 르윈의 따뜻한 음악과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영화”로 바뀐 것은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내가 본 르윈의 감성과는 뭔가 어긋나 보인다. 내게 <인사이드 르윈>은 그저 감수성 짙은 따뜻한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르윈이 임신한 진이 사는 집을 가는 장면에서 좁은 복도 끝, 비좁은 각도로 나눠진 두 개의 문은 과거 군대시절 영창이 생각나게 했다. 감방 모서리는 이상하게 직각이 아니라 45도 각도보다 훨씬 좁은 구조였다. 그리 좁지 않은 면적임에도 안에 있는 죄수들을 옥죄는 느낌을 주고, 눈을 감아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잔상이 미간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확고한 삶의 절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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