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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첩된 부조리의 세계, ‘푸줏간 소년’

My Text/Cine

by 아나키안 2014.03.2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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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푸줏간 소년(The Butcher Boy, 1997, 미국)

○감독: 닐 조단(Neil Jordan)

푸줏간 속 영혼 없는 돼지들의 광기


돼지, 교회, 악마, 외계인, 뮤직, 냉전, 정신병, 핵폭탄… <푸줏간 소년>이라는 영화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잡다한 환영(幻影)들이다.

시종일관 스크린 구석구석에서 맴도는 답답한 강박증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영화를 그저 유쾌하게만 볼 수 없는 마(魔)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로 탁월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닐 조단 감독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 소년 프란시(배우: Eamonn Owens)는 미치지 않고선 도저히 숨 쉴 수 없는 운명에 처한, 부조리한 푸줏간에 내던져진 딱한 존재이다. 우울증에 걸린 듯 틈만 나면 자살을 시도하는 엄마와 알콜중독자 아빠라는 최악의 환경에 더해 그를 돼지새끼처럼 취급하는 엄친아 필립과 누젠트 부인, 유일한 동무였던 죠마저 그에게 등을 돌린다.


당최 즐거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현실에서도 허를 찌르는 기습적인 유쾌한 대사가 틈틈이 폭소를 자아내지만, 이것은 우울증상이라는 강력한 핵폭탄 여파를 대비하기 위한 빈약한 쿠션일 뿐이었다.

적반하장의 몹시 불편한 진풍경들

영화에서 교회, 정신병원 등은 사회부적응자, 정신병자들을 개조하는 ‘정비소’이다. 프란시는 자살에 실패한 어머니가 끌려간 곳을 정비소라고 인식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스패너 조작하듯이 간단한 수리를 거치면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온전치 못한 자들을 치유하는 병원과 수도원에는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소아성애를 보이는 수도사 등 더 온전치 못한 감독관들과 머리에 짜릿한 전기충격을 선사하는 엉터리 의사들이 웅크리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곳곳에는 강도 높은 강박 장애를 보여주는 몽타주가 얼기설기 배열돼 있다. 냉전시대라는 배경으로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적인 핵폭탄 협박, 공산주의자들을 악마, 돼지로 취급하며 온갖 악담을 퍼부으며 득의만만해 하는 정치적 마스터베이션은 스크린 속 아름다운 풍경과 대조되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중첩된 부조리다.



수도원에서 성모 마리아를 영접했다고 말하는 프란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장면들, 프란시에겐 악마보다 악독한 누젠트 부인, 고급 음악을 배우는 엄친아와는 달리 아버지가 죽어가는 허름한 집에서 프란시가 불어대는 트럼펫에서 퍼져 나오는 슬픈 미장센… 이 모든 것들이 영혼 없는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푸줏간이라는 부조리한 세상에 갇혀버린 소년의 비애를 상징한다.


<푸줏간 소년>은 집단따돌림 문제, 가해자-피해자의 전도 등이라는 전형적인 미적분으로 해석하기에는 주제가 다소 거시적이며 정신분석학적이다. 또한 아이들의 미시적인 정신 장애로만 본다면 영화의 진면목을 놓칠 소지도 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냉전이라는 큰 배경 속에 촘촘히 설치된, 다양한 광채로 반짝이는 광기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푸줏간 소년>의 매력이다.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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