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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소멸』, 그대 삶에 낭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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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키안 2014.04.10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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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소멸: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산다는 것』, 박민영, 인물과 사상사, 2014.


“낭만도 소비로 얻는 시대”라는 구절에서 ‘서글픔’이 엄습한다. ‘욕망이 소비로만 발현되는 시대’라는 구태의연한 말보다 훨씬 감성적이고 직설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저자의 그 적나라한 설명을 듣다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와 함께 어찌 해 볼 수 없는 ‘낭패감’까지 치밀어 오른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보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더 딱해 보이듯이, 지금 이 순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할 때야말로 진정한 절망이고 악몽이다.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말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잘난 척, 있는 척 하는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영악한 바보’가 되어 갈 뿐이다. <낭만의 소멸>은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리얼하게 인지시켜주고 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디지털 묵시록’

가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책을 꺼내 보기가 매우 어색할 때가 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죄다 모바일 세계에 퐁당 빠져있으니,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종이책을 태연스레 쳐다보는 것이 뻘쭘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작은 메모리북에 볼펜으로 틈틈이 기입한 내용을 쳐다보다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자격지심마저 들 때도 있었다. 한층 진보된 장비를 어루만지는 날렵한 손놀림, 디지털 문명의 광채마냥 반짝이는 신비로운 액정화면… 디지털 신인류에 둘러싸인 한물간 종족이 돼버린 느낌일까? 아니면 고품격 모바일 앞에서 종이책을 들이대는 건 첨단 철기문명 앞에서 돌도끼로 설치는 것만큼이나 우스워 보여서일까?

저자는 제일 먼저 ‘소통 혹은 단절의 오브제’로서 휴대전화에 대한 담론들을 풀어헤친다. 편리한 휴대폰이 우리에게 여유와 자유로움을 선사하기 보단 오히려 억압의 도구(예: 모바일 오피스)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 같다. 모바일 기반의 SNS 역시 수평적인 소통의 도구라는 긍정적 역할보다는 신자유주의라는 억압의 기제 속에서 파편적으로 흩어진 개인들을 더욱 고립(소외)시킬 소지가 있고 실제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도 않다는 반박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SNS가 소셜커머스, 기업마케팅의 수단으로 변형된 작금의 현실에서 SNS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우리만의 터무니없는 환상이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소셜미디어의 약한 연결뿐만 아니라 밀도(응집력) 있는 강한 연대가 중심에 있어야만 사회변혁에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나는 점점 기계인간이 돼가고 있다.

90년대 초반 ‘과학동아’라는 잡지를 자주 읽었다. 대부분 이해하기 힘든 스티븐 호킹의 물리학 이론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미술관에 걸린 추상화보다 더 추상적인 은하, 행성, 성운 이미지들을 줄기차게 보여주던 잡지에 뜬금없이 미래에 도래할 첨단기술로서 홀로그램과 몸에 차고 다니는 컴퓨터 시스템 등을 소개하는 기획기사가 실렸다. 그걸 읽으며 코웃음을 쳤다. 삐삐도 구경하기 힘든 시절에 잡지가 묘사하는 신세계는 스필버그의 스타워즈 시대에나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컴퓨터를 몸에 지니고 활보하는 것도 모자라 몸속에 칩을 넣을 수도 있는 엄청난 디지털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과거 SF물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품이나 장면들을 일상에서 목격하고 있음에도 전혀 실감이 안 되는 이 현실 자체도 신기하다.

“사람들은 흔히 디지털 기기를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닮아간다. 디지털은 인간의 마음과 감수성을 변화 시킨다”(본문 104페이지)

때때로 스마트폰이 ‘윙~’ 진동하면 내 정신도 진동한다. 진동이라기보다는 거의 ‘발작’의 수준이다. 카카오톡의 느닷없는 알림 소리는 잠자고 있던 내 영혼을 급작스레 호출한다. 언제부턴가 나의 신경조직은 디지털 회로를 닮아가고 있다. 샛노란 개나리와 화사한 벚꽃이 지천에 피었어도 골방에 처박혀 스마트폰과 ‘부비부비’ 하고 있는 사이버 코쿤족(cocoon)이 돼가고 있다. 또한 스마트폰이 업그레이드 될수록 나의 지적 능력은 Non-스마트해지고 있다.

저자는 TV프로그램,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과 자기계발를 비롯해 김난도, 혜민 스님, 공병호, 김미경 등의 스타강사들이 펼치는 강연 열풍에 대해서도 구조적인 접근법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이것들의 기본 바탕은 ‘체제친화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사회비판 의식은 자동적으로 사그라진다. 내가 지금 힘든 것은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오직 게으르고 무식한 내 탓이라는 패배 논리나 숙명론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문화강국?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

서두에 말한 낭만의 소비는 문화산업과도 직결된다. 지금의 대중문화는 대중이 주체가 아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세계화 시대에 문화양식이 더욱 다양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미디어, 문화상품 제작과 유통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문화 산업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돈이 되는) 획일화된 문화상품과 여기서 파생된 공산품 소비까지 (PPL광고 등을 통해) 유도하는 허브 역할을 담당한다. 즉 문화산업도 제국주의로 치닫고 있다. 생산되는 문화상품의 양은 엄청나지만 다양성(질)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고, 심지어 우리들의 의식까지도 조작되고 있다.

더 큰 공포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경제권력

“지금과 같은 대의민주주의 구조 속에는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 정치판에는 기껏해야 강남 좌파와 강남 우파만이 존재할 뿐이다.” (264페이지)

“앞으로도 자본가들이 사상가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일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자본가가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모두 독점하는 자본 독재시대의 도래를 의심해봐야 한다”(293페이지)

대기업과 주요 언론, 정치권이 모두 패밀리라는 말은 그냥 상징적인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도 다양한 루트의 혼맥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소수집단(가벌:家閥)에 의해 99%의 국민이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심지어 대학도 대기업이 소유함에 따라 대학생은 학생이 아니라 소비자 또는 예비 노동자로 전락하고, 교수들은 지식인이 아니라 대기업의 명령에 복종하는 친위대 또는 전위대가 돼가고 있다.

저자는 선택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문제,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한 대기업, 자본가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논리를 통렬히 공격한다. 기업의 자발적인 사회적 책임 이행을 약속하며 ‘창조적 자본주의’를 내세우는 빌게이츠와 ‘열린사회 프로젝트’를 주창한 조지 소로스의 속내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요컨대 “직업적인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조종하고, 동원하는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정 이상을 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지금의 경제위기로 인한 고통에서 당신을 구해줄테니 그 대가로 우리에게 공공연하게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치구조와 과정이 통째로 삭제되고, 기업·자본독재에 의해 운영되는 새로운 빅브라더 시대를 의도하고 있다.

낭만의 소멸은 곧 인간성의 파멸로…

낭만이 소비되는 시대라는 말은 돈이 없으면 낭만적 삶은 포기해야 된다는 말과 같다. 고질적인 높은 실업률과 비정규직 양산, 경기는 불황인데 물가는 오히려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지속 등의 최악의 경제적 환경에서 연애, 결혼, 육아 등의 미래설계 역시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저자는 “낭만이 소멸한 시대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의 낭만은 문화산업에 의해 전방위로 포위됐고, 이에 기반한 우리들의 의식도 왜곡, 변형되고 있다. 낭만의 소멸은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파멸로 가는 전초단계이며, 그 중간과정에 놓인 현대사회는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와 다름없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처럼 현대문명은 위험을 통제할 수 없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타고 질주하고 있다. 저자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과 절제된 과학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합리적 대안은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때만이 가능하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가? 직시한 결과에 따라 문제인식과 대안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얼어 죽을 낭만이고 문화며 변혁이냐?”고 질책한다면 울리히 벡의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위험/재앙)는 민주적이다”는 조언을 던지고 싶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자신이 지금 노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노예로 멍청하게 살다 죽을 것이다. 주인이 던져준 한줌도 안되는 오늘의 달콤함과 안락함은 내일 당신을 도살하기 위한 음흉한 당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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