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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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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키안 2014. 4. 1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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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 애덤 스미스 지음/유인호 옮김, 동서문화사, 2008.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지만…”

애덤 스미스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스트라센리 성의 성주였던 외삼촌 집에 놀러갔다. 그런데 어느 날 스미스가 성 근처에서 놀다가 여자 집시에게 유괴된 적이 있었다. 만약 수색대가 그를 찾지 못했거나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났다면, 불후의 역작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개념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학을 스미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그가 경제학 분야에 이바지한 업적은 좌우,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성선설, 성악설이라는 해묵은 논쟁으로 여길 수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근원적 고찰에서부터 스미스의 사상은 출발한다. <도덕감정론>에 깃든 스미스의 철학이 정치경제학 분야로 더욱 구체화된 것이 <국부론>이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본능적으로 타인의 행복이나 불행에도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맨더빌의 ‘악덕’과 스미스의 ‘이기심’은 확연히 다르다. 스미스는 “덕과 악덕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며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이라는 맨더빌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기심 자체를 악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맨더빌과 스미스의 본질적 차이점이다.

즉, 스미스는 이기심 자체가 결코 악이 될 순 없다고 봤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는 <국부론> 제2장(분업을 일으키는 원리에 대하여) 구절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애용하는 명언이다. 개인의 이기심이 제대로(!) 작동할 때,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사회적 이익도 증진된다는 게 국부론의 핵심이다.

스미스는 보수주의자인가?

고전경제학의 아이콘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 중반의 가장 큰 이슈는 다름 아닌 유럽 주요 국가들이 추진하고 있던 식민지 정책이었던 것 같다. 이는 전쟁과 평화, 재정과 세금부담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치적 과제이기도 했다. 마치 현재 미국의 세계정책과 변화와 그 방향성을 논하는 것과 비슷한 차원처럼 보인다. 유인호 교수가 번역한 <국부론> 한글판이 1천 페이지가 넘음에도 스미스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파악하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지금의 정치경제 시스템과 달리, 왕을 단두대에 올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당시 유럽은 농업이 여전히 중심산업이었다. 좌우 스펙트럼 구별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다만, 자유주의(경제) 사상 관점에서 미국의 분리독립 인정, 영국-스코틀랜드 합방의 이점 강조, 동인사 회사에 대한 의회의 감독권 강화지지 등으로 미루어 최소한 국내 산업의 보호와 해외 식민지 건설 등을 핵심으로 하는 중상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인다. <국부론> 제5편 마지막 장에서 스미스는 “식민지 무역에 대한 독점의 결과는 이미 설명한 것처럼, 대다수 국민에게 있어서 이윤이 아니라 단순한 손실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특히, 같은 스코틀랜드인으로 당대 최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절친한 관계였다는 사실도 스미스의 스펙트럼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20대 중반에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라는 역작을 집필했고, 국가 통치마저 사회계약론 관점이 아닌 분업의 일환으로 봤던 흄은 막강한 정치적 파워를 갖고 있던 교회로부터 무신론자로 간주돼 상당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흄이 거론한 ‘공감’ 능력, 즉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자기 것처럼 느끼는 능력은 달리 표현하면 ‘역지사지’다. 스미스는 흄의 공감원리를 사회구성 원리로 확대·차용한다. ‘평등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는 가운데 스스로 도덕적 규칙과 양심을 만들어 사회관계를 형성·유지한다는 것. 그러한 시스템에서는 정치권력이나 권력자가 개입할 필요성이 없다. 자신의 이득만을 의도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원래 의도 속에는 전혀 없던 목적(사회의 이익)까지 추진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스미스는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존재들이 모인 사회구성체의 자발적 질서체계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전망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스미스가 혹독한 신자유주의의 마왕, 악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깃발 아래 샴페인을 터트리는 월스트리트 금융가들이 틈만 나면 애덤 스미스를 악용하기에 그 부정적 인식은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역사 속의 대부분의 사상가, 혁명가들이 가난했지만 스미스는 살아있을 때도 유명한 지식인이었으며, 책도 많이 팔렸고 돈도 제후만큼이나 많이 벌었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기초를 제공한 원흉(?)답지 않게 그는 남몰래 자선활동을 많이 해 죽은 직후 남겨진 재산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의회개혁 문제를 바라보는 스미스의 관점 등으로 미루어 그를 점진적 방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온건개혁론자로 보는 게 대체적인 시각인 듯하다. 즉 애덤 스미스는 개혁가였지 혁명가는 아니었다.

스미스는 엘리트주의자인가?

신분과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당시 유럽에서 ‘사람의 능력은 타고났다’는 논리는 자칫 숙명론, 능력(신분)에 따른 차별의 정당화, 엘리트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 <국부론>의 핵심 중 하나는 제1편에 나오는 ‘분업’의 원리와 ‘노동(임금)’이다. 스미스는 분업이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온갖 사람들이 지닌 천부적인 재능의 차이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 직업이 다른 성인들은 천부적 재능에 따라 크게 구별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차이는 대개 분업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이다”고 말한다. 습관, 교육, 풍습 등의 후천적 환경에 의해 차이가 발생한다는 스미스의 인간관은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이념과 직결된다.

스미스는 친기업론자인가?

“높은 임금은 가격을 상승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자신들이 상품이 잘 팔리지 않게 되는 나쁜 결과에 대해, 우리의 상인과 제조업자는 크게 불평한다. 그들은 높은 이윤의 해로운 영향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얻는 이득의 해로운 영향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들은 타인의 이득에 대해서만 불평하는 것이다” (국부론, 제1편 제9장 자산이윤에 대하여)

“주인(기업가)들은 언제 어디서나 일종의 암묵적인, 그러나 항구적인 한결같은 단결을 맺고, 노동임금을 실제의 비율보다 올리지 않으려고 했다”고 지적하는 스미스는 그들이 임금과 이윤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노동의 후한 보수는 일반 민중의 번식을 촉진하는 동시에, 그들의 근로를 증진 시킨다”고 역설한다. 고임금이 오히려 근로의지를 약화시키고 게으름을 만연하게 한다는 맨더빌의 주장과는 상반된다. 또한 “구성원의 압도적 대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가 번영하고 행복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심지어 “실제로는, 높은 이윤은 고임금보다 제품의 가격을 상승시키는 경향이 훨씬 크다”고 강조한다. 특히 “독점은 훌륭한 경영의 적이다”고 말하며 당시 동업조합의 배타적 특권, 중상주의에 기반한 수입억제책 등 무역통제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요컨대 “생산자의 이익은, 그것이 소비자의 이익을 촉진하는 데 필요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영국의 산업혁명은 와트의 발명만이 아니고 스미스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스미스의 경제이론이나 관련용어가 현재에도 온전히 적용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감정론>에 나타난 스미스의 철학은 시대를 뛰어넘은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국부론>에 담긴 스미스의 경제사상 역시 당시 현실에 기반해 근원적이고 체계적인 고찰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고전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노동자, 자본가, 지주라는 3대 계급 형성과 임금, 이윤, 지대 형태로 분배되는 생산물 가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애덤 스미스가 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그를 고전경제학의 아버지라 부르며, 그가 쓴 경제학 바이블(국부론)은 마르크스, 케인즈, 하이에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학자, 사상가들의 소중한 자양분이 돼 왔다.

하지만 어떤 철학을 태동하게 만든 밑바탕, 즉 ‘현실’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유동성을 갖고 있다. 스미스는 ‘정의는 사회의 중심 기둥’이므로 그 침범에 대해서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봤다. 다만 그 정의라는 것은 생명, 신체, 재산 등에 대한 침해의 방지이다(야경국가론). 유동적인 현실의 지형에 따라 정의의 구체적 내용도 언제나 달라질 수 있다. 당시 군주와 (토지)귀족들, (식민지)상인들이 주도하는 권위적 시스템에서는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철학이야말로 진보적인 대안이었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계에서는 어떤 계층(계급)이 (희소)가치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부작용이나 폐해는 무엇일까? 21세기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를 스미스가 지켜본다면 그는 어떤 말을 내뱉을까? 지금 이 시대의 정의는 스미스도 마르크스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장래에 상당히 낙관적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을, 스미스가 이론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스미스에게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없다. 하지만 스미스가 낙관적으로 보았던 대상은 자본주의라는 사회제도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노력해서 지적, 도덕적으로 성장해가는 민중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닐까?” : 본문 1126페이지(‘애덤 스미스의 생애와 사상’에서)


국부론 - 10점
아담 스미스 지음, 유인호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관련 포스팅

2014/01/08 - [My Text/Book] - 맨더빌은 진정 Man-Devil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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