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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없는 인정투쟁, 나이트크롤러

My Text/Cine

by 아나키안 2015. 2. 2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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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의 경계를 넘어선 자들

 

영화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를 보고 난 후, 호네트(Axel Honneth)의 ‘인정투쟁’이라는 개념이 떠오른 건 당연한 연상 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일상 속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우리들은 대체로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자긍심을 획득한다. 반면, 무관심 또는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 존재성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벌인다. 물론 그 투쟁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라는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어쩌면, 우리네 삶이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 인정투쟁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적당한 투쟁은 자신과 공동체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나 그 정도가 상식의 경계를 넘어섰을 때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나이트크롤러>는 인정투쟁의 경계를 넘어선 자들의 광폭한 무대가 되어 버린 현대사회 풍경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 <나이트크롤러>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의 문제점, 예컨대 상업적 언론의 병폐, 타락한 기자 정신, 실업과 고용의 악순환(고용불안), 공동체 윤리 증발 등의 메타포적 요소를 주인공 ‘루이스 블룸’(배우: 제이크 질렌할)과 그 주변 인물에 투영시킴으로써 현대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다.


참고로 감량을 해서인지 전혀 다른 배우처럼 보인 제이크 질렌할(Jake Gyllenhaal)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메소드 연기’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날카롭지만 왠지 영혼이 없어 보이는 그의 눈빛 연기는 압권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멍청한 세대


딱히 고정적인 일거리가 없는 루이스는 우연한 기회에 특종이 될 만한 사건현장을 캠코더에 담아 방송국에 팔아넘기는 ‘나이트크롤러’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 시작한 일은 돈과 명성을 동시에 얻기 위한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그 당연한 변질의 원인은 어쩌면 루이스라는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그를 정글에 내던진 시스템 자체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역채널 보도국장 ‘니나(르네 루소)’를 비롯한 그의 파트너도 루이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탐욕의 노예로 그려진다. 이 시대, 생존과 탐욕은 때때로 동의어로 취급된다.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종종 이성을 잃지만, 루이스는 시종일관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이코패스라기 보단 소시오패스(Sociopath)에 더 가까워 보인다. 소시오패스의 다양한 속성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기만’인 듯하다. 자기최면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천연덕스레 합리화하는 루이스의 달변은 변명이나 거짓말의 수준을 넘어 생존을 위한 절대적 사실로 둔갑한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것은 곧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전략이며, 자기방어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터넷으로 접한 경영학 분야 등의 얕은 지식을 고담준론(高談峻論)의 진리마냥 막힘없이 풀어 헤치는 주인공의 모습은 휘발성 강한 언론매체들의 보도행위와 감각적 콘텐츠에 쉽게 휘둘리고 길들여지는 뉴스 소비자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오버랩 된다. 



이른바 ‘신의성실 원칙’은 오직 구태의연한 법전에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내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신의성실에 위반되는 것이다. 인터넷의 무한한 바다 속에서 건져낸 한줌도 안 되는 정보에 득의양양하고, 포털뉴스 메인에 걸린 사진과 글을 접하며 천리안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접한 것 마냥 안분지족하는 우리는 어제보다 더 멍청한 존재가 돼가고 있다. 



나이트 크롤러 (2015)

Nightcrawler 
9.1
감독
댄 길로이
출연
제이크 질렌할, 르네 루소, 빌 팩스톤, 앤 쿠잭, 에릭 랭
정보
범죄, 드라마 | 미국 | 118 분 | 20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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