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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재즈선율, ‘위플래쉬’

My Text/Cine

by 아나키안 2015. 4. 5.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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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과 억압, 교육과 예술의 애매한 혼돈


영화에서 ‘앤드류’가 학교에서 쫓겨난 악질 교수 ‘플렛처’를 다시 만나 JVC 재즈 페스티벌에 함께 참가할 때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 의문은 페스티벌이 열리는 카네기홀 현장에서 플렛처가 예상과 다른 연주곡을 선정해 앤드류의 뒤통수 쳤을 때 비로소 풀렸다. 


최소한 플렛처는 교육학개론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교육자는 아니었다. 교육자이긴 보단 이기적이고 자존심한 강한 뮤지션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더구나 플렛처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존 키팅 선생처럼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았다. 


한편으론 10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시종일관 엉뚱한 생각이 맴돌았다. 분야와 장르를 넘어 교육과정에 있어 자유, 또는 열린교육과 스파르타식 교육, 좌우 대조된 스펙트럼에 대한 혼돈이었다. 또, 창조성이 요구되는 예술에서 스파르타 방식이 통용될 수 있는가? 영화에서 폭압과 다름없는 플렛처의 교육방식은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제자가 자살할 만큼 깊은 상처와 절망을 안기거나, 그 폭압을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에 이르거나… 



플렛처는 루이 암스트롱이나 찰리 파커같은 최고의 뮤지션의 등장을 소망한다. 그런데, 그의 교육방식은 결코 ‘천재교육’처럼 보이지 않는다. 스파르타식 교육과 천재는 왠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천재 모차르트가 플렛처 같은 변태에게 음악을 배웠을 리가 없을뿐더러 혁명가 베토벤은 아예 죽였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개인적으로 플렛처가 주는 교육적 교훈은 전혀 없었다. 자살을 잉태할 만큼의 채찍질(Whiplash)은 교육이 아니다. ‘순응’과 ‘저항’이라는 모순적 기제를 뛰어넘어,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음악적 진보를 얻는다는 드라마틱한 설정은 얼핏 감동적으로 다갈 올 수 있을지 모르나, 예술적 승화로 느껴지긴 보단 극단적인 묘사로 비쳐져 조금은 불편하다.


윤리가 생략된 교육을 과연 올바른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예술이 반드시 윤리적일 필요는 없지만, 어떤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사회적 책무에서 면책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제자의 자살소식에 반성과 성찰은 커녕 자기기만의 미화는 소시오패스의 전형이다.


재즈음악과 관련된 영화이기에 다양한 재즈 선율을 스크린에서 기대했지만, 그 기대만큼 내 귀를 만족시켜주진 못했다. 또한, 자유와 저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재즈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할 만큼 비정상적인 강박증환자들의 놀잇감으로 전락시킨 것 자체도 이 <위플래쉬>의 모순이다. 



위플래쉬 (2015)

Whiplash 
8.4
감독
데미언 차젤
출연
마일스 텔러, J.K. 시몬스, 폴 라이저, 멜리사 비노이스트, 오스틴 스토웰
정보
드라마 | 미국 | 106 분 | 201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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