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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코뮌의 머레이 북친…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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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키안 2015.08.0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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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 머레이 북친 지음/서유석 옮김, 메이데이, 2012.


사회적 생태론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자를 거쳐 오랫동안 자타공인의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던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2006)은 어느날 ‘아나키즘(anarchism)’을 접고 대안철학으로서 ‘사회적 생태론’(Social ecology)과 이를 응용한 공동체 비전 ‘코뮌주의’(Communalism)를 제창한다. 《머레이 북친의 사회적 생태론과 코뮌주의》는 비록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실천론을 나름대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창시했다는 ‘사회생태론’은 환경친화적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에코 아나키즘’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또한, 반국가주의, 반자본주의적 색채가 강한 마을·도시공동체(‘민회’가 이끄는 자치체)의 연대, ‘코뮌주의’, ‘연방제’는 오래전에 크로포트킨이 정립한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다른 방식으로 재배치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현대 아나키즘이 라이프 스타일(생활양식) 아나키즘, 반사회적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등으로 전락했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그가 제시하고 있는 비전들은 그간 수많은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이 제시한 이론들과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얼기설기 접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아나키즘이 마르크스주의처럼 소수에 의해 정립된 사상이 아니기에, 그 명칭이 어찌됐든 일차적으로 아나키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 생태주의나 코뮌주의 따위에 ‘창시자’라는 반아나키즘적 작위를 부여하는 게 몹시 거북하고 교조적으로 다가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마냥 이상한 코뮌의 머레이 북친… 그의 꿈과 모험은 조금은 기묘하다.


‘갑과 을의 구도’만큼 새로울 것 없는 위계구조론


그는 급진적 환경운동가 출신답게 자본주의 위기의 본질을 ‘생태위기’에서 찾고 있다. 또, 생태위기는 근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와 더불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즉 계급을 포함한 ‘위계구조’에서 출발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진행되는 일반적인 생태운동과 그의 사회생태론이 다른 점은 생태위기의 해법을 지배구조의 해체를 통해서 모색하고 있는 데에 있다. 


그런데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넘어, 산업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한 광범위한 위계구조(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비판과 사회변혁, 자치와 자유, 생태주의를 줄기차게 강조해 온 당사자는 아나키즘이었다.  


아테네 민회의 현대적 복원?


그는 “녹색운동과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생태계의 암”이라고 극언한다. 그러면서 국가, 사회, 정치의 개념을 설명하며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동체(폴리스)를 관리했던 아테네 민회 및 아고라 정치의 현대적 복원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전체를 경제에 예속시키고, 생활세계, 사회운동마저 상품관계, 시장관계에 예속시켜버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마로서 고대 도시국가와 같은 자립적 지역자치와 이들의 네트워크 ‘연방제’를 주창한다. 그의 정치 개념은 ‘사회적 제(諸)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정치’라고 정의한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의 권위적(!) 관점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요컨대, 그는 지역자치와 코뮌주의에 대한 주요 쟁점들을 설명하며, 풀뿌리 시민권 개념이 자리 잡은 ‘지자체 중심의 경제 시스템’이 중앙집권적 국가와 집중화된 거대기업 권력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가의 복제품으로 전락한 지역자치제도의 변혁을 통해, 즉 정치구조와 과정의 혁신을 통해 자본주의의 식민화를 타파할 수 있다는 그의 논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경제가 정치를 잠식하고, 대기업이 국가의 영역마저 침범하는 상황에서 과연 정치(자치)가 거대 경제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코뮌의 정체는?


그가 말하는 코뮌 또는 연방 시스템은 국민국가, 민족국가가 해체된 수준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수의 지자체들과 수평적으로 공존하는 단계를 뜻하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또한 신자유주의 유령이 전세계를 뿌리 깊이, ‘영혼마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자치라는 정치학적 개념으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배워왔다는 그의 자치경제론에는 하부구조(경제, 생산양식 등)가 상부구조(정치, 문화, 철학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정밀하게 구현되지 못한 것 같다.    


특히 ‘경제를 자치체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목표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이 부재하고 추상적인 선언에 그치는 애매모호한 논리들만이 나열돼 있어 더욱 혼란스럽다. 생태주의자들이 기존 제도권 정치에 편입되면 기득권의 노회한 술수에 동화되거나 농락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코뮌주의자들이 시의회 등 지방선거 참여를 통해 그람시의 ‘진지전’ 같은 전술을 구사해야한다는 논거는 지극히 이중적이며, 그 진정성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들이 조직구성, 다수결의 원칙 등에 고질적인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그것이 초래하는 소수자의 권리침해 등을 우려했기 때문인데 이를 몽상가들의 구태의연한 노파심으로 취급하면서, “소수자의 권리가 위축되는 일이 생기면 불가피한 경우 강제적으로 정정한다”는 해괴한 논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나키즘이라는 거대한 스펙트럼 안에는 막스 슈티르너의 극단적 개인주의, 생활양식 아나키즘, 톨스토이의 기독교적 아나키즘,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비롯해 아나르코 페미니즘, 생태주의(에코 아나키즘), 생디칼리즘(조합주의) 등 무지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든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불과하다는 등 단편적, 획일적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당최 잘 모르겠다. 더욱이 개인과 공동체(집단) 관계를 이분법적 구도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아 보인다. 마치 자유와 평등을 대립적 관계로만 보는 것처럼.


물론, 가끔은 아나키즘이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여타 철학에 비해 때로는 감성적으로 다가오고 이론적으로 허술한 구석도 꽤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나키즘 내부에 자리 잡은 프티부르주아적 냄새,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 호전적 테러리즘, 허무주의적 코드, 예술가적 직관성이 두드러지게 보일 때도 있다. 어쩌면, 머레이 북친이 내건 사회적 생태론, 코뮌주의는 그 허술함을 메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어찌됐든 생태공동체, 자치,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 파괴적 자본주의를 막는 노력 등은 아나키즘이든 다른 이름을 내걸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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