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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천국을 꿈꾼 오스카 와일드, 《거짓의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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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키안 2015.08.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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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쇠락』, 오스카 와일드 지음/박명숙 옮김, 은행나무, 2015.


‘거짓의 부흥’을 노래한 유미주의자


격언의 귀재, 통념과 도덕주의의 창조적 파괴자, 오스카 와일드(1854~1900)는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예술가다. 그의 글을 엮은 《거짓의 쇠락》에서는 와일드가 추구했던 예술론(미학)을 심도있게 접할 수 있다. 와일드는 ‘삶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믿는 극단적 유미주의자, 탐미주의자로 비친다.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평론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두 편, 개인주의와 예술의 자유를 역설한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 《거짓의 쇠락》 등이 실려 있다. 역자(박명숙)는 특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가 《거짓의 쇠락》에서 전개한 이론을 소설화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화체로 나오는 《거짓의 쇠락: 관찰》에는 시릴과 비비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노팅엄셔 시골 저택의 서재에서 진행되는 대화에서 ‘비비언’은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론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거짓의 쇠락》에서 제시되는 미학의 원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만을 표현한다. 예술은 생각처럼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며, 순전히 자신만의 길을 발전시킨다. 예술적 방식으로서의 ‘사실주의’는 완전한 실패이며, 모든 예술가가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두 가지는 형식과 주제의 현대성이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보다 삶이 예술을 훨씬 더 많이 모방한다.’ 삶의 의식적인 목표는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자연 역시 예술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거짓말’, ‘사실이 아닌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실보다 아름다움을 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술의 가장 은밀한 성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한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한 유미주의자,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스타일리스트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와일드는 “예술이 한 시대의 도덕적,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려고 할수록 그 시대의 정신을 덜 표현하게 된다”고 말한다. 역자는 와일드는 예술에 있어서의 통념에 의도적으로 도발해 논쟁을 일으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어 와일드의 독창성은 “그가 경멸했던 부르주아 사회와 속물적인 사람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하면서 그들을 비판했다는 것에 있다”고 덧붙인다.


예술의 수레바퀴, ‘창조와 비평’


개인과 사회에 있어 예술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비전은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논평을 곁들여》에도 나타난다. 역시 길버트와 어니스트라는 두 인물간의 대화체에서 와일드를 대변하는 길버트는 “비평 능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예술에 있어서 그 무엇도 창조해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한 “스타일이 없는 예술은 있을 수 없고, 스타일은 통일성을 필요로 하는데 통일성은 개인에게서 비롯된다”고 강조한다. 와일드는 창조와 비평을 바늘과 실처럼 서로 끊을 수 없는 필연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으며, 비평 자체마저 하나의 (창조적) 예술로 간주한다.


이어진 2부 《예술가로서의 비평가: 모든 것을 논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논평을 곁들여》에서 예술은 오직 ‘개성’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무수한 생각과 감정들이 폭발할 수 있는 공간, 예술은 필연적으로 부도덕하게 보일 수 있다. 와일드는 예술가, 몽상가의 참된 자세이자 이상적인 삶으로서 ‘관조’를 끄집어낸다. “관조는 사회적 관점에서는 시민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악이고, 고도의 문화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참된 업이라는 것.” 모든 예술은 부도덕하고, 모든 생각은 위험하다. 비평은 창작보다 더 창조적이며 최고의 비평은 예술 작품 속에서 예술가가 표현하지 않은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개인주의의 오묘한 융합


마지막 편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은 와일드의 정치사상적 견해를 엿볼 수 있는 글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지양과 발전을 독특한 필체로 전개하고 있다. 와일드는 권위주의적인 사회주의는 정답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또다른 노예상태로 전락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유재산은 진정한 개인주의를 짓밟고 거짓된 개인주의를 구축했다고 꼬집는다.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를 오직 ‘소유’의 척도로 하기 때문이다. 와일드가 지향하는 사회 시스템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사회주의에 토대를 둔 개인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 사회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은 과학의 발달, 문명의 진보이며, 개인주의는 자유로운 예술활동의 보장을 지향한다.


와일드가 사유재산의 문제점(범죄, 분노, 우울 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이 아닌 ‘질투’라는 감정을 끄집어낸 점은 이채롭다. 특히 육체노동은 존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트리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주목할 만하다. 육체노동은 조금도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지루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계로 작동되는 노예제도를 유토피아의 한 단면으로 제시한다. 그러한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의미 역시 ‘가장 강력한 개인주의의 발현’, ‘예술’에서 찾고 있다. 


자유를 꿈꾼 아나키스트


와일드의 화려하고 파격적인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왠지 예술적 관점에서 아나키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예술가에게 가장 적합한 정부의 형태는 아예 정부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예술에 대한 권력(군주, 교황, 민중 등)의 통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를 만들게 한 장본인이며, 와일드보다 한 시대 앞선 영국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영향을 어렴풋이 추측해 본다. 


한편으론, 와일드와 비슷한 유미주의자, 개인주의자를 대한민국에서 찾는다면 단연코 ‘마광수’를 꼽고 싶다. 작품의 코드가 일치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윤리나 도덕, 구태의연한 철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비평과 더불어 지극히 관조적이며 탐미적인 텍스트를 시종일관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선 일맥상통해 보인다. 


요컨대, 오스카 와일드가 추구했던 예술의 핵심은 개인주의에 깊은 뿌리를 둔 내용과 형식의 다양성, 예술가의 자율성인 것 같다.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가 재탄생하는 새로운(neo) 헬레니즘을 꿈꾼 그는 무지의 획일성과 권력의 규율성에 저항한 ‘아나키스트’라고 감히 평가한다. 또한, 모든 아나키스트가 예술가가 될 순 없지만, 모든 예술가는 아나키스트적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다시 음미하게 한다.


▲인상 깊은 구절


“사회주의 확립의 가장 큰 이점을 꼽으라면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필요성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는 점일 것이다… 한편, 사회주의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개인주의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한 위대한 사상가는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순응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권력은 순응하라고 사람들을 꼬드기면서 우리들 가운데에 몹시 역겨운 배부른 야만성을 퍼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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