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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의 최대 실수… ‘천륜 vs 정의’ 오류

My Text/Cine

by 아나키안 2015.09.06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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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협녀, 칼의 기억(Memories of the Sword) 

△감독: 박흥식


기시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협의 클리셰


《협녀, 칼의 기억》에서 이안(李安) 감독의 《와호장룡·臥虎藏龍》 흔적들이 자꾸 감지되는 건 《와호장룡》이 동양무협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큼 그 모든 걸 완벽히 갖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당수의 무협영화가 그러하듯 《와호장룡》은 중국 특유의 도가(道家)적 상상력이 응집된 작품이다. 《협녀》 역시 무협의 양념들을 다채롭게 구비했음에도 《와호장룡》 만큼 인상 깊거나 감동적이지 못한 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시감, 즉 재료의 신선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특히, 《와호장룡》은 자연배경, 무대장치, 의상과 무기류를 비롯한 소품 등에서 중국 정통무협의 미장센을 빈틈없이 갖춘 반면, 《협녀》에서는 시대배경이 자막이나 대사를 통해 고려시대라고 인식할 뿐 “이것이 한국의 정통무협이다”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만한 미장센을 제시하지는 못한 듯하다. 블록버스터급이라 할 수 있는 《협녀》의 영상미학에서 한국적 향기가 기대만큼 진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대나무 숲은 동양무협의 단골배경으로 등장한다.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 액션은 호금전 감독의 《협녀, A Touch Of Zen, 1971》 이래로 그 어떤 작품보다 압권이었다.


예컨대, 대나무 숲이나 갈대밭, 눈 내리는 궁궐 등에서 벌어지는 액션에서 참신한 액션 미학을 찾을 수 없었다. 구태의연한 클리셰 덩어리가 덕지덕지 이곳저곳에 얼룩져 있다는 느낌이다. 결국, 기존의 중국무협과 차별성이 없기에 비슷한 컨셉의 《와호장룡》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협녀》에서는 《와호장룡》을 비롯한 여러 작품 속 액션과 비슷한 컨셉이 많다. 영화 말미에 유백과 월소가 죽는 장면은 신현준과 김희선이 주연한 《비천무》의 결말과 묘하게 겹친다.


길 잃은 협(俠)… 찜찜한 결말


그렇다면 스토리 전개는 참신하거나 감동적이었나? 이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하기도 쉽지 않다. 스크린에서 인위적으로 보여주는 정보의 과다는 관객이 상상하거나 사유하는 공간을 위축시켜 버렸다. 너무나 친절하고 세세하게 과거와 현재의 실체를 보여주는 연출력은 사부(이경영)가 홍이(김고은)에게 진짜 홍이무덤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촌스러움으로 다가온다. 상징과 은유, 압축된 표현이 부족하면 작품의 퀄리티 저하로 직결된다.

부모를 배신하고 대의를 져버린 원수를 죽이기 위한 ‘복수혈전’이 정도(正道)나 정의(正義)를 바로 세우기 위한 ‘협객열전’으로 전환되는 시도는 좋았으나 그 연결고리가 매끄럽지는 못한 것 같다. 철천지원수라고 여겼던 자들이 진짜 부모라는 걸 끝까지 몰랐거나, 설령 알았어도 거사를 치른 이후에 깨달았다면 ‘오이디푸스’처럼 미학적으로 더 완결성이 있어 보였을텐데… 


협(俠)에 대한 지나친 미화


원수라고 여겼던 유백(이병헌)과 월소(전도연)가 생부모라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협(俠)의 정신을 내세워 천륜(天倫)을 져버리는 게 진정한 의협심(義俠心)인지는 의구심이 간다. 《협녀》의 최대의 실수는 ‘천륜’과 ‘협객의 정신’을 대척점에 놓고 갈등 구조 속으로 몰아세웠다는 점이다. 이는 관객의 호응, 공감대를 절대로 이끌어 낼 수 없다. 《협녀》가 실패한 건 출연배우의 사사로운 스캔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영화 자체에 내재된 철학적 오류에서 기인한다. 빈곤한 철학이 영화를 제대로 받쳐 주지 못했다.

▲《협녀》에서 홍이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운명을 수행하는 존재라면, 《와호장룡》의 옥교룡(장쯔이)은 그러한 숙명을 가볍게 내팽개치고 자유를 향해 몸부림치는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홍이의 부조리한(?) 의협심에 반해 《와호장룡》의 옥교룡(장쯔이)은 ‘천륜’이나 ‘정의’ 따위에 매몰되지 않는 캐릭터다. 보검 청명검을 갖고 싶어 무작정 들이대고, 인륜이나 도덕적 소양이라곤 개나 주라는 듯 천방지축 동네방네 활개친다. 더욱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상징되는 ‘푸른 여우’(정패패)와 정통이라 할 수 있는 무당파의 마지막 무사 리무바이(주윤발), 유수련(양자경)을 별차이 없이 동급으로 취급하는 작태 등은 보는 이들을 아연실색케 한다. 그야말로 협객의 자유분방함을 널리 떨치는 자유의 아이콘이자 주체성 강한 존재이다.

▲협(俠)을 다룬 수작으로는 첸 카이거 감독에 공리, 장풍의가 출연한 《시황제 암살, 荊軻刺秦王, 1998》을 적극 추천한다. 이 영화에는 오랫동안 중국 민중의 뇌리에 가장 강력하게 각인돼 있는 협객 ‘형가’가 등장한다.


한편으론, 중국을 포함함 동아시아에서 협객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진시황을 암살하려 진나라 궁궐로 쳐들어간 형가(荊軻)를 뽑는다. 형가는 민중을 대신해 독재자를 죽이고자 했던 혁명가나 영웅이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야말로 협객(俠客)이다. 


그렇다면, 영화 《협녀》에서 홍이는 협객인가 영웅인가? 나를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협객일 것이요, 불특정 다수(민중)를 위해 사악함을 뿌리 뽑고 정의를 세웠다면 영웅일 것이다. 하지만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면 그건 부조리 덩어리일 뿐이다. 상당수의 관객들은 《협녀》에서 호방한 협객도 살신성인의 영웅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협녀, 칼의 기억 예고편]


협녀, 칼의 기억 (2015)

Memories of the Sword 
4.3
감독
박흥식
출연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이경영, 김태우
정보
액션, 드라마 | 한국 | 121 분 | 2015-08-13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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