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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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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키안 2009.04.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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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2009, 이상.

어릴적 해태 타이거즈 팬으로서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수많은 실화(Facts)들을 다시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 설레이며 읽었다.

프로야구 원년(82년) 타점왕에 10승 1세이브까지 기록한 만능 야구선수 김성한, 한국 프로야구 최초 노히트 노런의 방수원, 무한질주 도루왕 김일권, 핵폭탄 이상윤, 탱크 김무종(포수), 홈런왕 김봉연, 까치 김정수, 특급잠수함 이강철,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 해결사 한대화, 싸움닭 조계현,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 바람의 아들 이종범 등등.

야구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는 쇼킹 플레이를 밥먹듯이 하며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해태 타이거즈는 당시 모든 야구팬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전설적인 야구팀이다. 97년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해태제과가 도산나면서 구단의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스타급 선수들을 LG, 삼성 등으로 무더기로 팔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버렸고, 결국 2001년 해태는 기아 타이거즈로 대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해태 타이거즈의 강한 매력 중의 하나는 열악한 재정, 허접한 라인업(얇은 선수층)으로도 무서운 파이팅 정신을 통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무려 아홉 차례나 거머쥐었다는 믿을 수 없는 업적과 주기적으로 초호화 메이저리그급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것.

설령 정규시즌 1위를 못해도 죽기살기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탄탄한 재정과 두터운 선수 층으로 무장한 삼성, LG, 한화 같은 강팀들을 물먹이며 결국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는 깡다구 정신의 구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해태 타이거즈 야구는 아드레날린을 무작위로 분출시키고,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이성을 마비시킴으로써 결국 미친놈으로 변신케 하는 달콤한 악마의 야구였다.

한편, 3일에 한번씩 등판해 무조건 완투를 해야했던 이상윤, 투수가 부족하거나 부상당하면 1루 보던 김성한이 투수 포지션을 맡고, 유격수 이종범이 뜬금없이 포수를 보는 것 등의 기이한 행태는 타이거즈 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던 비정상적인 작태였다. 하지만 선수층이 얇은 해태 타이거즈는 이런 작태가 유난히 심했다.

프로 선수들에 대한 무자비한 혹사, 비인격적 대우 등 부조리한 현상들은 예전에 비해 많이 없어졌지만 승리에만 집착하거나 돈에 눈이 어두워 프로 정신을 망각하는 현상은 아직도 여전하다. 돈많은 일부 구단이 저지르고 있는 무차별 스카우트와 자유계약(FA)의 부정적 현상도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저자의 말처럼 프로야구는 국민소득 2만불은 되어야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고급 스포츠이고 한국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너무 일찍 출발했다. 형편없는 인프라와 재정구조, 비정상적인 선수 로테이션, 구단과 선수 간 계약에서의 불공정 작태, 지역연고와 관계된 부정적인 지역주의 등등.

전라남도 광주를 연고로 출발한 해태타이거즈와 오랫동안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았던 전라도를, 특히 정치인 김대중을 서로 연결했다는 시도 자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광주, 전남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울분을 무등 야구장에서 풀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응원가로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남행열차'가 울려 퍼지는 무등야구장의 서글픈 신바람은 기아 타이거즈로 바뀐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인상깊은 구절

전두환에서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까지, 정권은 해마다 5월 18일(광주민주화항쟁기념일) 광주에서 야구가 치러질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원정경기에서마다 해태 타이거즈는 해마다 승전보를 보내며 '그날'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1983년부터 9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는 5월 18일 경기에서 7승 무패를 기록했다)...(중략)...

몇몇 대학생들은 굳이 중계석 옆쪽 자리로 파고들어 '오월의 노래'(민중가요)를 합창하다가 뒤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군중 속으로 숨바꼭질하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목이 터져라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환호하고, 기뻐서 그리고 한스러워 눈물을 흘렸고 부둥켜 안았다. '김대중'은 꺽인 현실의 날개였지만, 무등 야구장의 '해태타이거즈'는 날아오르는 희열이었고 모든 희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본문 126~127페이지)

그리고 혹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의욕을 가끔 부린 것은, 단 한번 기회만 주어진다면 악전고투 끝에 4등으로 올라가 3등, 2등, 1등 팀을 차례로 잡아내고 우승하던 해태처럼 기어이 한 건 해낼 수도 있는 것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 길에서 나의 패배와 불안을 위로하는 것은 '삼미 슈퍼스타즈'였으며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기껏 해태 타이거즈였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기억으로 못난 나 자신을 용서하며 감싸안았고,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으로 이를 악물고 보다 높은 곳을 꿈꾸며 걸었다. (본문 251~252페이지)

그래서 꼴찌 팀 삼미의 옛 팬으로서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번 물어뜯을 수 있다는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본문 253~254페이지)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 8점
김은식 지음/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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