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나는 공산주의를 몹시 싫어한다… 공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그것들을 국가로 흡수시키기 때문이며 나는 국가가 폐지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불가피하게 국가의 수중으로 재산의 집중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감독의 권위주의적 원리의 완전한 근절을 바라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도덕화하고 문명화한다는 구실 아래 사람들을 항상 종속 시키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퇴폐시켜 왔다. 나는 집합된 또는 사회화된 재산과 그러한 체제의 사회가 어떤 종류의 권위에 의해서이건 간에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으로 향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결사(free association)를 통하여 맨 밑바닥으로부터 조직되어 올라갈 것을 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집산주의자(collectivist)이지 결코 공산주의자(communist)가 아니다.  

[다니엘 게렝(하기락 역), ‘현대아나키즘’(도서출판 신명, 1993) p.68~69 ]


그때까지도 지식에 있어서 마르크스는 나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다. 나는 정치경제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을 뿐더러 형이상학적 정신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의 사회주의는 단지 본능이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그는 이미 무신론자였고, 유물론자, 그리고 박식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오늘날 지지 받고 있는 사상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났다. 비록 자만심과 뒤섞여 있었지만 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대한 그의 지식과 열정적인 헌신을 진심으로 존경하였다. 나는 언제나 유익하고 재치가 넘치는 그와의 대화를 무척 좋아했지만 슬프게도 사소한 감정이 종종 서로에게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이에 솔직히 터놓는 친밀성은 없었다. 우리의 기질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그는 나를 감상적인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 나는 그가 자만심이 강하고, 남을 잘 속이며, 교활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나 또한 옳았다. 

[출처: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bakunin/works/various/mebio.htm]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후에도 국가는 존속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국가, 권력, 권위, 그리고 정부를 훨씬 더 강화하면서 존속시킨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명칭을 변경하는 것뿐이다. 흡사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사물을 변화시키는 데에 충분하거니 한 것처럼…

[방영준, '아나키즘의 정의론에 관한 연구'(서울대 대학원 박사, 1990), p.111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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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은 인간의 원초적 덕목이다. 진보가 이뤄져 온 것은 바로 불복종을 통해서다. 그렇다. 불복종과 반란을 통해서다”

“유토피아가 들어있지 않은 세계지도는 들여다 볼 가치가 없다”

-오스카 와일드-


“궁극적으로 아나키즘은 하나의 정치운동이나 철학 또는 예술적 감각의 측면에서 정의될 수 없다. 아나키즘은 그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이다”

-숀 쉬한, ‘우리시대의 아나키즘’에서-


“아나키즘은 학설이 아니다. 사상과 행동의 역사적 경향이다. 이 경향은 계속해서 혁신되고 발전하는 수많은 길을 가지고 있으며,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은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노암 촘스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인생을 바꿔야 한다”

-랭보(Rimbaud, Jean-Nicolas-Arthur)-


“인간의 법률은 경멸할 수 있지만 자연법칙에는 저항할 수 없다”

-‘노틸러스’호의 네모(nemo) 선장 (해저2만리 中)-


“아나키는 무질서나 혼돈이 아니라, 여하한 형태의 지배자도, 주권자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질서하다면 자연의 질서는 회복된다.” 

-푸르동- 


“사적 개인에게 생산수단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주는 것과 전체주의적 중앙계획에 따라 생산을 통제하는 것 양자를 모두 거부하는 하나의 새로운 경제체제-모든 상품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며, 화폐를 폐지하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공동창고에서 공동생산물을 나누어 갖도록 하는 것.”

-크로포트킨의 경제 패러다임(아나키 공산주의)- 


“어느 누구도 자기 일에 타인을 복종시키거나 예속상태에 묶어 둘 기회를 갖지 않으며,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말라테스타의 다원적 아나키즘- 


“모든 아나키스트는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모든 사회주의자가 반드시 아나키스트는 아니다.” 

-아돌프 피셔- 


“아나키즘사회는 늘 성장하고 있는 욕구에 따라서 끊임없이 진보하고 항상 재조정되는 사회이다.” 

-크로포트킨- 


“나는 공유를 싫어한다. 그것은 자유의 부정이고 자유 없는 인간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공산주의는 국가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모든 힘을 집중시켜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재산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시킨다. 반면에 나는 국가의 철폐를 원한다. 국가는 인간의 도덕화와 문명화를 구실로 지금까지 인간을 노예화하고 박해하고 착취, 부패시켰을 뿐이다. 나는 또 재산 상속의 철폐를 원한다. 그것은 국가 제도에 다름 아니고 국가 원리의 직접적 결과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집산주의자 일지언정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민중은 정의와 평등의 본능을 가진 본능적인 사회주의자임에 틀림없다.” 

- 바쿠닌- 


“중앙집권 하에서의 국가의 거대한 권력에 직면하고 있는 한, 개인도 집단도 솔선하여 자발적으로 독자적 행동으로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프루동- 


“더 이상 꿈꿀 수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

“내가 장단에 맞춰 춤출 수 있는 그런 혁명만을 원한다”

-엠마 골드먼-


“잔인한 힘으로 가난한 자의 것을 도둑질하고 그들을 노예로 몰아가는 거대한 기계가 국가의 모습이다”

-버나드 쇼-


1. 국가나 정당이 현재의 경제 노동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나아가 국가나 노동임금 체제 두 가지를 폐지하기 위해선 자유연합 또는 자유노조를 구성 실천해야 된다. 

2. 경제 사회적 독점구조는 농민 산업노동자 지식노동자 모두의 자주적인 연대에 의해서만 폐기될 수 있다. 

3. 땅과 자본의 공동소유에 의해 독립된 자주적 생산과 분배를 실천해야 되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국가나 정당이 아닌 사람들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경제구조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4. 모든 지역, 지방, 국제적 연대에 근거한 자유스러운 동의에 의해 공동이익을 추구하고 연합된 힘으로 개인의 자율과 독립을 가져와야 한다. 

5. 인종 국가를 넘어선 국제적 연대로 각자의 삶을 향상시키고 자유로운 규율하에서 공동체 이념을 강화한다. 

6. 정부의 횡포, 재벌의 독점적 경제행위를 막기 위한 사회운동을 전개한다. 

-1992년 베를린 노동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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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사상계의 지형은 비슷하였다. 한국에도 중국이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1880년대부터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소개되어 개인적 차원에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한국 사상계에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던 사회진화론을 극복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민족주의, 대동사상과 함께 민족해방운동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아나키즘 수용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내세운 명분론과 대동사상 및 사회개조/세계개조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러시아 혁명, 3.1운동의 발생 등 차례의 계기를 맞아 점차 확산되어 갔다. 


한말에는 온갖 조류의 사회주의가 소개되었지만, 192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주의계의 주류는 아나키즘이었다. 그 후 사회주의계는 아나키스트계와 공산주의계로 분화되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운동과 정치혁명을 부정하고 사회혁명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 방법론은 테러적 직접행동론(재중국 아나키스트 중심으로, 의열단: 신채호), 혁명근거지건설론(크로포트킨 근거,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 등), 경제적 직접행동론과 일상투쟁론(아나코 생디칼리스트, 각종 태업, 노동자선동 등) 등이 있었다.


20세기 아나키즘이 제3의 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상실케 된 내적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나키즘이 지닌 관념성이다. 사상의 순수성에 치우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 자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둘째, 아나키즘의 조직론의 한계이다. 사상의 민중성을 강요하지만 그 힘을 조직화하는데 등한시 했다. 

셋째,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사상의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출처: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지식산업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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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1756∼1837·英)


영국의 비국교도(非國敎徒)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드윈은 유럽에서 아나키즘을 최초로 이론화(理論化)한 사상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골학교 여러곳을 다니다가 11세때 독립 교회파 목사인 사무엘 뉴튼의 제자가 되면서 기독교 산데만 파(派)와 접하게 된다. 로버트 산데만(Robert Sandeman·1718∼1771)장로가 지도자였던 이 교파는 초대교회의 복귀와 공동생활을 주장하며 스코틀란드에서 창설되었다.


산데만 파 사람들은 교회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부정했다. 그들은 신앙에 따르는 인간은 국가와 아무런 관계도 안가진다고 주장하였으며, 임명된 목사가 한사람도 없는 독립적인 집회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재산 공유(共有)를 바람직한 이상으로 믿고 남는 것은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하며, 화폐를 저축하는 일은 죄악이라고 가르쳤다. 고드윈은 10대초부터 20대에 이르기까지 이 교의(敎義)에 충실했다. 23세때 혹스턴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산데만 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이 고드윈에겐 두고두고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으며, 37세때인 1793년에 내놓은 대표적 저서 『정치적 정의(正義)』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윌리엄 고드윈은 "정치의 악폐는 아마도 끝나지 않겠지만, 범죄의 역사를 참된 자유와 평등의 사회로 바꿔놓을 가망은 희미하나마 한번 추구함직한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을 이론적으로 펴낸 저서가 바로 『정치적 정의』이다. 이 책에서 그는 4가지 기본적인 명제(命題)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고드윈의 사상을 압축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 고드윈이 밝힌 명제는 첫째 인간의 도덕적 성격은 지각작용의 산물이며, 인간이 태어날 때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모든 수단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정부(권력)인데, 인간 정신은 간섭하지 않으면 저절로 잘못을 알아내고 진리에 접근한다는 주장이다. 셋째, 정부(政府)는 원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실천에 있어서도 악(惡)이라는 것이다. 


그는 입법도, 법의 운용도 부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실제로 특정개인에게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부(富)는 탁월한 것이라는 환상을 강화하는 것이 정치제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고드윈은 재산과 권력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최초의 한 사람으로써, 이러한 지적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의 적(敵)이 되었으며, 또한 자본주의의 적이 되었다. 넷째의 명제는 인간의 완전가능성에 대한 언명이다. 완전가능성은 인류가 가진 가장 명백한 특성의 하나이며, 따라서 인간의 지적(知的)상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상태도 또한 전진적인 개선의 과정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고드윈은 그후 프루동이나 바쿠닌등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러시아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에게는 상당한 감명을 주었으며, 후대의 많은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선구자중 한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고드윈은 『정치적 정의』이외에 『세미나리 설명서』(1783), 『연구자』(1797), 『영국공화제사』(1824), 『인간고』)(1831)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출처 : 인터넷 대학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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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동 Proudhon, Pierre-Joseph 1809~1865


프랑스의 가난한 선술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목동으로 보냈다. 그에게 이상사회란 자기 아버지와 같은 수공업자나 농민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뜻한다. 총명했던 그는 브장송에 있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해 부유한 상인 아이들로부터 가난뱅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집안의 경제적 파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인쇄 견습공이 되었지만 향학열을 식지 않았다. 그는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라이어를 독학하는 한편 여러 지역의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과 사상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1838년 브장송 아카데미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유학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최초의 저서 '재산이란 무엇인가? (1840)를 발표해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 여기서 프루동은 '나는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산은 도둑질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재산은 일반적인 의미의 재산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을 착취해 취득한 재산이었다. 반면에 다른 의미의 재산, 즉 농부가 자기가 일할 토지를 소유할 권리나 장인이 도구나 작업장을 소유할 권리는 자유라고 생각했다. 프루동이 공산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공산주의가 개인으로부터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자유를 파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42년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후속편인 '소유자에 대한 경고'를 출간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판사가 그의 주장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유죄를 모면했다. 1843년 프루동은 리옹과 파리를 방문해, 카를 마르크스와 미하일 바쿠닌 같은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프루동은 곧 마르크스와 대립하게 되었다. 프루동이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1846) 를 발표하자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1847)으로 프루동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 간의 역사적 대립의 시작이었다.


1848년 초, 파리로 가서 '인민의 대표자'를 비롯해 모두 네 종류의 신문을 편집했는데, 네 신문 모두 정부의 검열에 의해 차례로 폐간되었다. 프루동은 1848년 혁명기에 정치투쟁에 나섰다가 제2공화정의 대통령인 루이 나폴레옹을 비판한 죄로 1852년까지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신문을 편집했고, '혁명가의 고백'(1849), '19세기의 혁명관'(1851) 등의 주요 저서를 집필했다.


1852년에 석방된 프루동은 경찰의 항상적인 감시 때문에 활동하기가 어려웠으나 1858년에 '혁명과 교회에서의 정의를 위하여'(3권)를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모두 몰수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다. 벨기에로 망명한 후 열린 궐석재판에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1862년에 파리로 돌아온 뒤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상호부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파리의 수공업자들은 1865년 그가 죽기 직전에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의 주된 세력이 되었다. 프루동의 마지막 저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대하여'(1865)는 그의 임종 직전에 완성되었다. 그는 이책에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라고 주장했다.


프루동 이전에 영국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 등이 아나키즘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아나키즘(정부 없는 사회), 상호부조주의(신용은행 설립을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 연방주의(중앙집중주의적 정치 조직의 부정) 같은 사상은 프랑스 혁명사상을 개인적 경험으로 재해석한 결과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루동은 자기가 하나의 사상체계를 정립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을 건설하려는 사상을 혐오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후에 그를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바쿠닌과 러시아의 작가 페테르 크로포트킨이 발전시킨 아나키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사상은 러시아의 인민주의, 1860년대 이탈리아의 급진 민족주의, 1870년대 스페인의 연방주의, 프랑스에서 발전하여 나중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큰 세력을 형성한 생디칼리슴 등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초까지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계급의 급진주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용: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웅진닷컴, 2001, pp1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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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 ∼1856)

 

"국가(國家)는 누구든지 자기의지(自己意志)를 가지지 말 것을 요구한다. 만약 한 인간이 그것을 가졌다면 국가는 그를 배제하고 폐쇄하고 추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그것을 가진다면 그때는 그들이 국가를 배제할 것이다. 자기의지와 국가는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적대관계에 있는 힘이다. 양자간에 영원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독일의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는 자신의 저서 『유일자(唯一者)와 그의 소유』를 통해 개인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국가를 독재적이건 민주적이건 개인의지의 부정(否定)이다. 그것은 집단적 인간을 숭배하는 데다 기초를 두고 있으며, 국가의 입법제도 및 법에 의한 강제야말로 행동의 의경의 고정·동결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는 유일자(ego)로서의 자기를 소유하기를 원하는 인간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에고이스트와 국가간의 투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슈티르너는 본명이 요한 카스파 슈미트(Johnann Kaspar Schmidt)이다. 저서『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내놓으면서 필명을 막스 슈티르너로 한 것이 그의 이름이 돼버렸다. 독일 한 빈곤한 악기장(樂器匠)의 집안에서 태어난 슈티르너는 1826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면 거기서 헤겔의 강의를 듣게된다. 정신질환을 앓았던 모친을 돌보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가 1832년 베를린대학으로 돌아왔다. 몇해동안 고등학교 무급교사를 지내다가 1839년에 대학교 정식교사직을 얻게되면서 그의 생활은 비로소 안정을 찾게된다.


평소 가까이 사귀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슈티르너는 5년 남짓 교사생황을 하는 동안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派) 와 어울리며 교우관계를 갖는다. 이 그룹은 프리드리히가(街)의 술집 힙펜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신학자 브루너 바우어가 이 그룹을 지도했는데, 여기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혁명시인 헤르베흐등 많은 지식층이 참여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슈터르너가 쓴 것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 (Der Einzige und sein Eigentun) 이다. 이 책은 1845년에 출간됐다.


이 저서에서 슈티르너는 개인과 국가의 대립관계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정신과 모순되는 비도덕을 옹호했으며, 헤겔을 비롯한 그 시대의 사상 전 영역을 공격했다. 또한, 모든 종교적 신앙의 파괴를 역설하고 , 절대적 원리와 당(黨)같은 개인위에 군림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 책은 출판당시 많은 비난을 받고 한때 잊혀졌으나 그가 죽은후 40여년이 지난 1890년대에 들어 아나키스트 집단을 통해 널리 읽혀지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니체의 『초인(超人)』, 칼라일의 『영웅(英雄)』, 에머슨의 『현자(賢者)』등 저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슈티르너의 말년은 매우 불운했다. 부인과 헤어진 이후 한때 빈민굴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빚 때문에 감옥에 가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 『반동(反動)의 역사』가 있다.


출처: http://news.kyunghee.ac.kr/fs/content.asp?number=2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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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 12. 14~1932. 7. 22)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혁명이념을 보급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무장봉기에 있다는 이른바 '행위의 선전'을 주장했다.


10대에 제1 인터내셔널에 가입함으로써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연설가이며 선동가로서 급진적 아나키스트로서 루마니아·이탈리아·이집트·스페인·아르헨티나 등 남·북아메리카에서 혁명단체를 조직했다. 죽을 때까지 약 12년간 옥고를 치르고 3차례 사형언도를 받았으며, 35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제휴하기도 했지만 정치적 목표달성을 위해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벨기에·스위스에서 노동자 대회를 결성해 무장봉기를 획책한 그는 여러 번 추방되기도 했다. 


말라테스타는 1899년에 미국을 방문해 강연과 함께 무정부주의 잡지를 편집했다. 1900년 이후에는 이탈리아 혁명(1913~14)을 준비하기 위해 런던에 머물렀으며 1919년 사면되어 영구 귀국했다. 1922년 파시스트(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활발한 정치활동을 폈으며 1932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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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


바쿠닌은 러시아의 트베리(지금의 칼리닌) 지방 소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목가적인 전원생활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바쿠닌은 1840년에 독일로 떠나 청년 헤겔 학파에 매료되었다. 러시아 정부 의 귀환명령을 거부해 여권을 회수당한 바쿠닌은 프랑스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프루동, 마르크스 등 당대의 저명한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이를 통해 사회주의 혁명과 슬라브 민족해방운동의 연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바쿠닌은 1848년 2월 혁명 동안 정치 투쟁에 동참한 후 독일의 한 지방에 은거하면서 최초의 혁명강령 선언인 [슬라브 민족에 고함 Aufruf an die Slaven]을 작성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소멸해 가는 반혁명세력으로 간주한 그는 이 책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전복시켜 중부 유럽에 슬라브 민족의 자유연방을 결성할 것을 촉구했다. 바쿠닌은 농민계층, 특히 무력저항의 전통을 지닌 러시아의 농민계층을 다시 다가올 혁명의 중추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소극적인 도피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봉기를 주도했으나 검거당해 러시아 정부에 인도되었다. 1851년 5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요새에 유폐된 바쿠닌은 이 곳에서 [고백록Confession]을 집필했다. 1857년, 마침내 석방된 그는 영국을 거쳐 이탈리아로 갔다. 이 곳에서 그는 평생을 헌신하게 되는 아나키즘 원칙들을 정립했으며, 다양한 비밀 결사들로부터 일부는 실제이고 일부는 가공적인 혁명조직망을 조직하기도 했다.


바쿠닌의 만년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은 카를 마르크스와의 이념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에 정착해 있던 그는 제1인터내셔널 즉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는데 그 내부에 비밀혁명전위대인 '사회민주주의 동맹'을 둠으로써 인터내셔널 내부에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바쿠닌과 마르크스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거물 사이에서 제1인터내셔널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 대립은 결국 1872년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에서 바쿠닌주의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그러나 양 세력 사이의 불화는 향후 여러 해 동안 유럽의 혁명운동을 분열시켰다.


바쿠닌이 저술한 '압제의 제국 독일과 사회혁명 L' Empire Knouto-germanique et la revolution sociale'(1871) 및 '아나키즘 사회 Staat en anarchie'(1873)는 마르크스와의 논쟁을 다룬 것들이다. 폭력을 통한 기존 질서의 파괴를 역설했던 바쿠닌은 정치적인 통제, 중앙집권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과 같은 마르크스의 원칙들을 거부하고 러시아 농민계층에 구현된 저항의식을 내세웠다. 바쿠닌의 아니키즘은 이처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대립명제로서 비로소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궁핍한 말년을 보내던 바쿠닌은 건강이 약화되어 친구들의 보조금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러한 형편에 처해 있으면서도 아나키즘의 신념이 약화된 적은 결코 없었다.


바쿠닌은 프루동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즘의 주창자로 평가되고 있다. 논리적인 이론체계가 마련된 것도 아니고 의욕에 찬 방대한 저술들은 미완성인 경우가 많았지만 바쿠닌의 명성과 매력은 유럽 곳곳에 숱한 추종세력을 형성시켰다. 영국, 스위스, 독일에 적은 수이지만 아나키즘 조직이 구축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들이 세력을 과시했다. 이탈리아 및 스페인에도 바쿠닌주의적 무정부주의 운동은 계속 융성했으며, 특히 1936년까지 스페인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바쿠닌의 후예들이었다.


인용: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pp1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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