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남을 위한 삶’보다 ‘나를 위한 삶’에 몰두하기>,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8.


고독한 늑대가 지쳤나?


한국 언론개혁 과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강준만 전북대 교수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150여권에 이르는 책을 출간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실로 ‘박리다매’의 전형이며, ‘책 쓰는 개미’라고 해도 될 만큼 지독하게 부지런한 건 인정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세월에 장사(壯士) 없다더니, 강준만 교수도 이젠 늙었나? 한 번 물면 끝장을 보기 전엔 결코 놓지 않는 ‘찰거머리’, ‘고독한 늑대’가 지친 걸까? 이젠 그가 ‘평온’을 논하고 있다! 생뚱맞아 보인다. 여기저기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더니 고요한 평화를 갈구하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 ‘시대정신’이 조금씩 변해 온 것 같기도 하다. 정치, 사회, 문화, 미디어, 언어, 역사 등 분야를 망라해 온 그의 텍스트에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하이에나는 때를 기다린다: 김대중 정권 지역감정 그리고 조선일보>(1999년),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2000년), <이문열과 김용옥>(2001년), <노무현과 자존심>(2002년), <노무현 죽이기>(2003), <리영희>(2004) 등에서 알 수 있듯 2000년대 초기에는 정치·사회·문화 분야의 유명 인사들을 집중 공략했다. 특히, 월간으로 발행하는 <인물과 사상>은 그가 수많은 정치인과 지식인, 시민운동가, 철학자, 문화예술인 등을 조지는 ‘안방 무대’였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우리 사회의 특징을 논할 수 있는 핵심 소재들을 끄집어내 오래된 병폐나 사회문화 현상을 재치 있게 분석하기 시작한다. 물론 <안철수의 힘>(2012)처럼 똥볼(!)을 차는 경우도 다소 있지만, <갑과 을의 나라>(2013), <감정독재>(2013), <싸가지 없는 진보>(2014) 등은 그가 우리사회의 핵심코드를 짚어내고 진단하는 특유의 기자정신을 소유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내 삶의 가치는?


최근 출간된 <평온의 기술>은 이전에 나온 재기발랄하고 발칙한 책들에 비해 그다지 재미있거나 감동적이진 않다. 종종 고리타분한 텍스트로 인해 졸음이 쏟아진다. 그런데 <평온의 기술>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던 강준만 교수의 새로운 문법을 발견하게 된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자유와 평등, 개인과 사회, 성공과 실패, 긍정과 부정 등의 상반된 개념들에서 균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논리가 어정쩡하고 꼰대스러운 ‘중용’의 자세인지, 기가 막히는 ‘부정과 부정의 변증법’으로 봐야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직설적인 논법을 즐겨 쓴 예전의 책들에서는 쉽게 발견하긴 힘든 접근법처럼 보인다. 


‘솔직’한 것이 타인에게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고 부정적인 개념인 ‘내숭’이나 ‘허세’가 때론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용감’한 것과 ‘무모’함, ‘순수’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것인가? 나는 ‘열정’적인가, ‘욕정’에 불타고 있는 것인가? 때때로 ‘절제’는 ‘억압’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나는 ‘자기효능감’을 느끼는가 아니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가? 모든 가치의 척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다는 논리가 텍스트 전반에 펼쳐진다. 마치 객관성을 갖추고 공정한 판단을 하고자 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되고 싶은 걸가? 아니면 내 삶이 진정 행복지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공유하고자 하는 걸까?


많은 경험을 하고 삶의 성찰이 깊어 가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돌’의 크기가 커지고 무게도 점점 무거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않도록, 감정의 기복과 가치판단이 쉽사리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무거운 돌. 파도에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닻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 무엇. 집밖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부화뇌동’의 위험성에 노출되는 최첨단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소확행이든 대확행이든, 부자든 빈자든 소비해야 만족하고,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용감해야만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사회적 지위와 부, 명예의 크기가 곧 인간 본연의 가치와 일치되는 것에 침묵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속물로 살아가는 자본주의 쓰레기라는 걸 동의하는 것이며 ‘평온’도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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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주식회사: 진보는 어떻게 자본을 배불리는가》, 피터 도베르뉴·제네비브 르바론 지음/황성원 옮김, 동녘.


기업화 되어 가는 시민운동


“민간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세계최대의 비영리조직인 유나이티드웨이는 2011년 51억 4,000만 달러를 모았다. 같은 해 해비타트 인터내셔널의 후원금과 수입은 15억 달러였고, 국제자연보호협회는 11억 7,000만 달러였으며, 월드비전은 10억 6,000만 달러, 세이브더칠드런 미국 지부는 6억 1,900만 달러, 수잔 코멘 유방암 재단은 4억 3,900만 달러였다. 여기에 이들 조직들은 투자, 부동산, 토지 소유 등의 형태로 수백만 달러(때로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도 보유하고 있다.”(175페이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단골 이슈가 되어 왔다. 쉽게 말해 기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 일부를 사회에 환원해야한다는 논리다. 대체적으로 환경보호나 개발원조, 복지분야에서 CSR이 활성화 돼 있고, 관련기관·단체(NGO)들과의 협력을 통해 추진되기도 한다. 


사실, 환경운동조직이나 개발원조단체들과 기업 간의 동반자 관계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사회적 책무 이행 차원에서 비영리기관, 복지단체 등에 상당한 자금을 후원하는 유명기업들과 기업인들도 언론보도에서 종종 접하곤 한다. 미국, 유럽지역, 다국적기업 등에 비해 자주 목격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한국기업들도 재단설립 및 후원, 또는 NGO들과 손을 잡고 각종 ‘착한일’ 벌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참여기업은 기업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매출향상까지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NGO는 프로젝트 진행을 위한 펀드조성을 통해 조직을 운영하고 확대할 수 있다. 


“나이키 ‘걸 이펙트 네트워크’의 대답은 분명하다. 빈민에 대한 투자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게 아니라 영리한 경제행위’이다. 간단히 말해 이런 활동은 기업의 권력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장개척을 가능케 한다.”(73페이지)


피터 도베르뉴(Peter Dauvergne,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국제관계학)와 제네비브 르바론(Genevieve LeBaron, 셰필드대학교 정치학과)이 공동 집필(번역 황성원)한 《저항 주식회사, PROTEST, INC.》에서는 비영리기구들이 대기업과 손을 잡고 추진하는 착한사업들의 정체를 신랄하고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치고 변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일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다국적 기업들처럼 NGO들도 기업화·관료화 되어가고 풀뿌리운동을 잠식해버린다고 강조한다. 기업의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분투하다 보니 NGO들 간의 경쟁이 심화될 뿐만 아니라 기업의 홍보 에이전시로 전락했다는 비난마저 듣는다. 사회 시스템을 변혁하기 보단 기존 질서에 동화되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져버렸다는 것.


소비에 침식되는 대의


“오늘날 국가는 빈곤 같은 문제의 책임을 정치 및 경제 시스템에서 개인의 선택과 소비자 의사결정의 문제로 돌리고 있다.” (35페이지)


공동브랜드 개발, 공정무역, 친환경마크 등은 길거리나 마트 등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개념이다. 저자들은 이를 ‘대의명분 마케팅’이라고 일컫는다. 대의명분과 소비를 결합한 영업기법(공정무역, 윤리적 구매, 지속가능한 쇼핑…)이라는 것이다. (착한)소비자들은 북극곰이 새겨진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대체로 비싼 공정무역 상품을 소비하면서, 환경마크가 인쇄된 제품을 구매하며 흐뭇해한다. 정부의 감시를 받거나 경찰의 곤봉과 물대포를 피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대의명분 동참이다. 자신이 대의를 위한 행동(소비)에 참여했다는 보람도 느낀다. 요컨대, 소비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대의, 혁명까지 팔아치우는 식성을 과시한다. 그러한 소비 카니발에 NGO들도 대거 동참하며 대의를 위한 소비를 호소하고 있다. 


“기업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운동가들은 결국 자본주의 교리를 사실상 문제 삼지 않고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대기업과의 협력관계나 유명인사의 모금활동, 레드 같은 로고는 의미 있는 사회적 기여를 하기 보다는 소비를 부추기는 효과가 더 크다.”(89페이지)


그린피스, 세계자연기금, 국제엠네스티, 국제자연보호협회, 월드비전 등은 기업후원 등을 통해 다국적NGO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활동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물론, 대규모, 국제적으로 진행하는 이런 캠페인이 무의미하다고는 볼 수 없다.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의 기업화’, ‘기업과의 동반자 관계’는 사회 하부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급진성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또, 프로젝트 중심사업, 이를 위한 자금 확보 과정에서 기업의 이해관계에 얽매일 소지도 있다. 무엇보다 시민운동진영 내에서 시장질서, 규제완화, 사유화 가치 등 자본주의 핵심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하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세상을 바꾸고자 시민운동에 뛰어 들었건만, 조직을 유지하고 운동가들의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민들의 순수회비로 운영되는 운동이 몇이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업들을 상대로 펀드레이징을 해야 하고 기업·기관들을 대상으로 착한일(프로젝트) 프리젠테이션도 해야 한다. 운동가들의 기업형 모금활동, 브랜드화 추진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대안은 도대체 어디에…


“기업화된 비정부기구와 소비자운동은 지금의 세계질서 구조를 안정화·합리화하면서 반자본주의·반세계화운동가들 일부는 길들이고 일부는 환멸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주류에 편입시키고 있다. 그래도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는 이들은 군사화된 경찰과 정보기관이 맡는다. 이로 인해 풀뿌리 운동은 약화되고 기업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209페이지)


한층 유연화 된, 자본논리에 순응하는 운동에 대해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운동에 대해선 철저히 탄압한다. 저자들은 자본질서에 복종하는 세력은 후원하지만 저항하는 자들은 철저히 짓밟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NGO든, NPO이든 그 정체가 무엇이든 운동단체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그 활동내용을 들어다보면 다양성 차원에서는 오히려 협소해진듯하다. 심지어 기업, 정부, 로비단체, 자선재단, 비정부기구로 구성된 ‘비영리산업복합체’라는 말까지 사용된다. ‘군산복합체’ 개념과 마찬가지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와 안전,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엘리트 내에서의 공생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한때 워렌 버핏은 이렇게 말했다. ‘계급전쟁이죠. 맞아요.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건 우리 계급, 부유한 계급이에요. 승리하는 것도 우리죠.”(234페이지)


오늘 국제뉴스에서 세계적 갑부 빌게이츠가 “사회주의만이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발언한 기사를 봤다. 환갑을 맞이하는 빌게이츠가 드디어 이순(耳順)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 자본주의 시스템은 환경파괴, 기후변화 등으로부터 지구를 결코 지킬 수 없다, 민간부문의 이기심으로 인해 대체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잠재적인 탄소세 부과,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을 위한 기술개발 등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요지다. 솔직히, 빌게이츠가 진짜 사회주의자로 전향해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파멸로 치닫고 있는 세계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한 빌게이츠 방식의 화법일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이 운동의 기업화 경향에 경종을 울려, 운동가들 내에서 논의를 촉발시키고, 풀뿌리 운동을 옭아매는 공공정책들을 재평가할 기회를 마련하는 데 일조했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기업과 자본주의 체제의 안녕을 가장 중시하는 현 질서를 정당화해버리게 되는 ‘운동의 기업화 방식’이 아닌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는 실질적 전략(대안)은 책 속에 없다. 사실 그러한 대안은 그간 수많은 혁명가, 사상가 등이 이미 제시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존재했던 대안을 망각한 채 안락한 편의주의에 도취되어 적과의 동침을 자행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쓰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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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자유와 예속의 원류》, 박홍규 지음, 필맥.


배부른 아리스토텔레스… 거지를 자처한 디오게네스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 앞에 서서 “나는 대왕인 알렉산드로스다”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개(犬)인 디오게네스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왜 개로 불리느냐고 묻자 “무엇인가 주는 사람들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짖어대고, 나쁜 자들은 물어뜯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이건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라”고 대답했다. 


어릴 적 텔레비전, 만화 같은 데서 얼핏 본 듯한 장면이다. 현재,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저서는 한 권도 존재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박하고 자족적인 생활, 권력이나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참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화폐 폐지를 주장했는데, 아마도 자연과 함께 하며 자족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적 이상사회와 깊이 연결돼 있는 듯하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디오게네스’를 입력해보니 그의 철학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설명한 책은 오직 한 권뿐이었다. 아나키스트 박홍규가 쓴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자유와 예속의 원류》였다. 물론 《디오게네스는 왜 행복할까?》라는 책도 있었는데 어린이를 위한 그림 동화책이다. 박홍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대편에 바로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자유, 자족, 무욕의 철학이 있다고 분석한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시킨다.


즉, 노예출신 디오게네스야말로 자율주의(자유주의, libertarianism),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누구로부터의 억압을 거부하고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자율주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전체 세계의 시민이라는 세계시민주의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인종적 우월의식, 제국주의 등을 타파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의 철학, 초창기 기독교의 메시지와도 부합된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자타의 차별을 없애고 사람을 널리 서로 사랑(겸애)하라고 전파한 묵자(墨子)의 사상과도 비슷해 보인다. 


박홍규의 말대로 홈리스, 거지, 개와 같았던 디오게네스에 비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잇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대학에서 철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전공수업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정치사상가들이 이들이다.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야말로 현재의 신보수주의, 네오콘(Neo-conservative)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글로벌리즘, 또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그들의 사상은 시장질서, 자유로운 자본이동, 다양성과 상충되는 문화통합을 강조한다. 미국 신보수주의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 “돈이 곧 정의”


이른바 인민재판을 받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철인정치를 부르짖은 플라톤,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을 자처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엘리트정치, 귀족정치, 소수의 지배를 강조한 꼴통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정치를 줄기차게 강조한 성리학자들과 묘하게 매칭된다. 박홍규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분배·교환적 정의)은 돈이 최고, ‘돈이 곧 정의’라는 결말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들의 사상은 초인을 외친 니체, 나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칼 슈미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네오콘을 거쳐 한국의 꼴통들에게도 주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계승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덕’을 강조하고 있다. 박홍규는 미덕 중심의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유, 자율적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라고 지적한다. 샌델의 저서가 불티나게 팔린 데에는 이명박의 공로가 지대하다. MB가 국정지표로 공정사회를 내걸며 샌델의 저서를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기존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정의론과 별반 다른 게 없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돌풍현상은 정의에 굶주리고 공동체 파괴에 허탈감을 느낀 한국인들의 허기를 자극했기 때문이 아닐까.


박홍규는 자유와 평등, 무욕과 평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디오게네스 철학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자연과 함께 하는 자치사회를 지향했다고 결론 맺는다. ‘가난한 유토피아’가 사실은 진짜 풍요로운 유토피아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가 있다면, 어딘가에는 이를 위해 희생한 빈곤과 굴종의 사회가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부(富)와 힘(권력), 그것이 곧 선이고 평화이며, 전문가·엘리트들이 정치사회(공동체)를 지배하는 사회가 좋은 국가라는 것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참모습이다. 


권력가, 자본가들이 흔히 주장하는 이론 중 하나가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이다. 이는 민주주의, 복지사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허상이며, 부자들의 아전인수, 조삼모사의 간계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철인정치, 이데아 사상과 비교되는 철학자로서, 민주주의자이며 고대 원자론을 완성했던 데모크리토스의 말은 엘리트주의자, 국가주의자, 인종우월주의자, 심지어 부자가 정치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권력지향형 자본가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반박처럼 들린다.


“시민정(민주정) 하에서의 가난이 엘리트정이나 군주정에 보통 수반된다고 하는 번영보다 낫다. 그것은 자유가 노예보다 좋은 것과 같은 이치다. 현자는 모든 국가에 속한다. 왜냐하면 위대한 영혼의 집은 전 세계이기 때문이다.” (본문 133페이지)


※책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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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유형지에서(외)》, F. 카프카 지음/박환덕 옮김, 범우.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7.3.~1924.6.3)의 텍스트를 접하노라면 팀 버튼(Tim Burton)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기괴함, 요컨대 그로테스크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팀 버튼의 그것에는 (설령 비극적이더라도) 동화에 등장하는 낭만적 요소가 강하지만, 카프카의 작품에는 악몽적 현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때로는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급속히 팽창하는 기구처럼, 순식간에 대기권을 뚫고 상승하는 로켓처럼 그 극단까지 치고 올라가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파열되고 소진돼 감정의 찌꺼기마저 남아있지 않게 되는 허무의 경지를 맛보게 된다. 그의 텍스트에서는 격정적으로 질주하는 엔진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고독한 질주는 ‘내러티브’마저 파괴한다. 대부분 미완성으로 끝난 카프카의 작품에서 오히려 ‘창조적 파괴’를 엿본다.


카프카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에는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고립)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설명한다. 대체로 우울하고 어두운 공기를 내뿜는 작품들이 많지만, 은근히 위트와 표현의 기발함을 맛볼 수 있는 것들도 꽤 있다. 한국 카프카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박환덕 박사가 번역한 이 책은 카프카의 단편들과 그가 쓴 서신(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서평(청년 오스발트의 이야기), 작품론(역자) 등을 엮은 것이다. 


외판원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며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던 주인공이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의 충격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가족들도 눈치를 채버리고, 기상천외한 에피소드가 집안에서 펼쳐진다. 《변신》은 마치 팀 버튼의 단편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이 연상될 정도로 엽기적이고 악몽처럼 섬뜩하며, 동화처럼 흥미로우면서 결국에는 비극적이어서 서글프다. 


기능주의적 존재들의 부조리한 대행진


《변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철저히 기능주의적 존재들이다. 즉, 분업체계에 최적화된 대량생산의 자본주의적 존재들이다. 존재에 대한 평가는 철저히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소통은 부재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그레고르의 ‘변신’은 그 안정된 시스템을 깨트리는 요인이 된다. 벌레로 변한 주인공이 별의별 행동을 통해 발악을 해도 더 이상 기존 시스템에 들어갈 수 없다. 기능과 소속을 잃었기 때문이며,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기능성이 존재의 고유성, 본래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조리한 비극이다.


카프카에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는 쓸모없는(無用의) 존재들이란 도무지 없다. 각자 자기가 갖고 있는 역할에 몹시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마당에 출근과 직장생활을 걱정하는 주인공, 《시골의사》에서 세찬 눈보라를 뚫고 왕진하는 의사, 서커스 곡예사, 경마장 기수 등 각자 맡은 임무나 직업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러한 충실함이 전혀 ‘유의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늦은 밤까지 글을 썼던 카프카, 완전한 유대인도 독일인도 아니었던 그는 아웃사이더, 이방인의 숙명을 짊어진,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존재’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실용주의, 그리고 각자 분담한 역할(직업·노동)이 존재의 고유성을 오히려 박탈하고 소외시킬 수 있다. 카프카는 직업상 그 누구보다도 인간이 물화(物化)적 존재로 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존재성을 잃어버린 자의 극단적 행태를 작품 《유형지에서》가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장교는 죄수를 처형하는 고문기계를 통해 자기존재의미를 재확인한다. 죄수에게 진짜 죄가 있는지 없는지, 그 처벌이 합당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장교-고문기계-죄수’의 3자 구도는 견학자로 등장하는 탐험가의 존재로 인해 무참히 깨진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분석하며 ‘유럽-비유럽’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는 구도를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정작 죄수가 아닌 장교가 기계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져 자기처형을 시도할 때다. 장교에게는 고문기계야말로 정의-부정의, 합리-불합리의 기준을 초월해 자기정체성을 증명하는, 단순기계를 넘어 아이텐티티가 이입된 상징체가 아니었을까? “그(죽은 장교) 눈길은 평안하면서도 깊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프카 방식의 집념


“모든 사람은 반드시 법을 추구합니다.”하고 사나이가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이 오랜 세월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 문을 찾아와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법 앞의) 문지기는 그 사나이의 임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희미해져 가는 그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포효하듯 외쳤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소.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니까. 이제 나는 가서 이 문을 닫아 걸겠소.” 《법 앞에서》중에서

 

이민족이 침입했는데도 궁성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황제와 위병대, 오직 노동자와 상인들에게 조국의 수호 임무가 맡겨져 있는 이상한 나라의 현실을 그린 《낡은 페이지》, 법(法)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평생 동안 간청해 온 어느 사나이의 이상한 절망을 그린 《법 앞에서》 등은 짧은 분량만큼이나 상당히 인상 깊었다. 


사회적 풍자로 다가올 수도 있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냉소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텍스트에서는 절망보단 어떤 집념, 좌절의 악순환에서도 굴하지 않는 오기가 느껴진다. 아버지(헤르만 카프카)와의 끊임없는 불화에 고뇌했던 그가 직접 쓴 편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항의에 의해서 그것을 정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일일이 관철할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그것을 정정하면 역시 훨씬 진실에 가까워질 수가 있으며 그 결과 우리 두 사람의 기분도 다소 안정되어서 삶과 죽음을 좀 더 마음 편하게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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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이윤 엮음, 필로소픽.


아직까지 낯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라는 저서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고 선언한 비트겐슈타인은 왠지 까칠하고 시크한 캐릭터로 다가온다. “신은 죽었다”고 천명한 니체에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아직까지도 낯설고 이질적인 철학자의 이름이다. 


오래 전, 어느 도인에게 “절대적 존재, 즉 신(神)이 있다면 그 신은 어떻게 탄생했고 그 영역 밖에는 또 무엇이 있나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기독교 신자였다면 “무조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세요”라고 했겠지만, 그 도인은 “인마!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시공의 지배를 받는 나는 그것을 초월하는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고 부연했다. 비트겐슈타인도 이와 비슷한 답변을 한다. “이 영원한 삶도 현재의 삶과 마찬가지로 수수께끼가 아닌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공간과 시간의 밖에 놓여 있다.” -『논리철학논고』에서


‘논리와 언어’라는 드넓은 대양에서 자유롭게, 때론 힘겹게 유영했던 고독한 고래 한 마리 ‘비트겐슈타인’은 2000년 초반 고 신해철이 결성한 그룹 이름이기도 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철학자를 모티브로 했던 신해철은 한국대중음악의 비트겐슈타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어찌됐든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만큼이나 신해철 음악에서 타협하지 않는 반항가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 같다. 버트런드 러셀의 제자였지만, 독자적인 길을 가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실증주의 및 일상언어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분석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시지포스의 삶을 실천한 철학자


캠퍼스에서 유유자적한 철학자로서의 삶을 뿌리치고 1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진 입대, 초등학교 교사생활, 수도회 정원사, 건축가, 케임브리지 복귀, 동성애(성정체성) 논란 및 민족정체성 혼돈, 유대인으로서 나치 경험… 등 비트겐슈타인의 다사다난한 삶을 접하노라면 카뮈가 말했던 ‘이방인’, ‘시지포스’의 표본으로 느껴질 만큼 절망과 외로움, 그리고 투쟁의 악순환을 지속하는 삶을 영위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비트겐슈타인의 인생노트》는 고담준론의 철학적 내용이 아닌 일상 속 주요 화두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들을 엮은 책이다. 그가 1차대전 참전 중에 쓴 일기 및 중년에 쓴 일기를 비롯해 저서인 《논리철학논고》, 《문화와 가치》, 그에 관한 일화들이 담긴 각종 평전과 회상록 등이 참고문헌으로 사용됐다. “철학은 시처럼 써야 한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는 의외로(!) 논리실증주의적 철학자보단 어느 명상가의 잔잔한 향기로움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사유의 다양성


“신의 존재가 자연의 논리로 증명될 수 있다는 게 로마 가톨릭의 도그마다. 이 도그마 때문에 나는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될 수가 없다. 만일 신이 나 자신과 같은 또 하나의 존재이고, 단지 나의 외부에 있는 무한히 강력한 존재라면, 나는 신에게 저항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여길 것이다.” -모리스 드루어리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에서


“만일 너와 내가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려 한다면, 종교에 관해서 말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모리스 드루어리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에 대한 비망록」에서


상징과 비유, 아포리즘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솔직한 고뇌와 아픔이 가슴에 와 닿는 구절도 종종 있다. 그는 특정 교리를 믿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자세로 삶을 바라본 듯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제철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상당량을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의 목표는 생각의 논리적 명료화다”고 강조하지만, 헤겔 철학처럼 절대주의로 귀착되진 않는다. “사람들은 내게 자신들이 철학을 배우지 않아서 이런저런 것들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이것은 짜증나는 헛소리다. 철학이 마치 일종의 과학인 것처럼 둘러대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또는 다윈 같은 이의 진정한 공로는 참인 이론을 발견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비옥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 것에 있다.” -『문화와 가치』에서


요컨대, 그에게 철학의 의미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유(생각)의 다양성에 있는 듯하다. 고착화된 사유의 편향성이 아니라 그 스타일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 투쟁이야말로 철학의 의미이자 목적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어느 분야에서든 결과보단 부단한 투쟁의 과정을 중요시 한다. “조악한 문장처럼 보이는 것이 좋은 문장의 씨앗일 수 있다.” -『문화와 가치』에서 


언제나 함께 했던 우울과 자살의 그림자


비트겐슈타인은 가족들과 지인들의 자살과 죽음을 유난히 많이 경험한 불행아다. 그러한 실연과 아픔은 삶에 대한 회의, 절망감, 우울증상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때때로 천재와 불행은 기묘하게 달라붙는 자석처럼 숙명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나를 위협하는 완전한 고립의 두려움 때문에 매우 고통 받고 있다. 이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날마다 무미건조한 슬픔만 이어지는 저녁을 두려워하는 삶일 뿐이다.” -레이 몽크 『비트겐슈타인 평전』에서


그럼에도 그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다시 바위를 산 정상으로 굴려 올리는 시지포스의 굳건한 자세를 견지한다. “절망에는 끝이 없고, 자살로는 절망을 끝내지 못한다. 스스로 기운을 차려서 끝내는 수밖에 없다.”, “똥밭에 빠졌을 때 할 일은 오직 하나, 행진하는 것뿐이다. 훌쩍이다가 죽는 것보다는 분투하가다 급사하는게 낫다.” -『일기 1930-32, 1936-37』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추스르고 일어나서 다시 나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했던 일이다.” -모리스 드루어리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에서


영원한 사랑은 가능한가?


‘진정한 사랑은 영원하다?’,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는가?’ 유한한 존재,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존재에게 영원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영원성은 지금 현재 속에 있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또한,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 속에서 사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현재 속에 사는 삶에는 죽음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도 현재 속에 있지 않을까? ‘나는 현재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혁명가란 자기 자신을 혁명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문화와 가치』에서


세상에 만족한 자는 오직 지금 행복한 사람뿐일 것 같지만, 누구나 세상을 개선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저 너 자신을 개선하라. 그것이 네가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고 주장한다. “삶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삶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삶이 그 형식에 맞을 때 문제는 사라진다.” -『문화와 가치』에서


철학적 논리가 아닌 삶의 논리


비트겐슈타인의 마지막 유언은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자꾸 말하려고 시도할 때, 갈등과 불행의 씨앗은 잉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제1원리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뒤엎는 철학적 반역자일수도 있다. 세상이 어떠하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경이로움(타우마제인)을 시종일관 강조한 그는 논리의 클리셰 또는 이성의 간지에 발목 잡힌 철학적 논리를 극복하고 삶의 논리를 구현한 철학자가 아닐까. “우리는 먼저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철학을 할 수 있다.”-『일기 1930-32, 1936-3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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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이민아 옮김, 궁리. 


“나는 증오하기에 존재할 수 있다”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의 《맹신자들》에서 다루는 대상은 ‘종교운동’뿐만 아니라 사회혁명, 민족운동 등 이른바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50년대 초반에 쓰인 이 책에서 말하는 ‘우리 시대의 맹신자들’은 주로 공산주의자, 나치주의자, 파시스트, 일본인, 가톨릭교도 등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촌을 충격의 도가니에 몰아넣고 있는 집단 IS(이슬람국가)를 보고 있노라면 맹신자들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긍정적인 대중운동이 있고, 부정적인 대중운동이 있을 수 있다. 에릭 호퍼는 옳고 그름을 통한 대중운동 평가가 아닌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생태계, 작동원리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그는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의 ‘열정’을 지속시키는 도구로써 ‘종교화 기술’을 거론한다. 그 종교화 기술의 핵심은 신념(이념)이나 노선이 아닌 ‘증오’라는 점을 강조한다. 반복하자면 무언가를 파괴하거나 변혁하고자 하는 ‘열정적 증오’가 대중운동의 생명력을 좌우한다. 


아울러 열정적 증오로 쉽게 무장될 수 있는 세력은 다름 아닌 역사의 루저(loser). 즉 좌절의 쓴맛을 본 패배자, 불평분자, 사회부적응자들이다. 요컨대, 대중운동은 개인의 좌절된 희망을 대체한다. 그 희망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 메시아를 고대하는 맹신의 차원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결국 맹신자들은 자기희생을 불사하는 피 흘리는 순교자, 광폭한 테러리스트가 될 개연성이 크다.


맹신의 심리,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는 빈민층의 보수성은 특권층의 보수성만큼이나 뿌리 깊다는 저자의 논변은 매우 탁월하게 느껴진다. 특히, 개인의 자율성,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나치당원 등이 되고자 맹신자들의 심리분석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만큼이나 논리적, 체계적이다. 


에릭 호퍼에 따르면, 대중운동은 증오로 똘똘 뭉친 패배자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 개인의 독립성이나 개성을 말살하고 단결과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은 극좌와 극우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서로 통한다는 말이 나온 듯하다. 이러한 맹신자들은 어찌됐든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려야만 불안한 영혼을 진정시킬 수 있다. 그들이 신봉하는 대의는 수단에 불과하다.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한 그들이 동질감을 느끼며 함께 몸담을 수 있는 조직과 나치가 유대인을 적으로 만들 듯 그들의 증오심을 과감히 행동으로 표출할 수 있는 대상(주적)이 있으면 족하다. 집단적 증오를 표출하고 열정적으로 희생을 감수하기까지 하는 맹신자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일베현상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137페이지) 


여기서 악마는 비이성적 증오를 표출할 수 있는 이방인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방인은 외국인노동자, 중국동포, 전라도, 성소수자, 여성… 등으로 맹신자들의 주 타깃이 될 수 있다. 호퍼에 의하면, 대중운동은 생명을 갖고 있다. 열역학 제1법칙처럼, 대중운동의 에너지(열정)는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쳐 다른 대중운동으로 옮겨간다. 이런 점에서 대중운동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질병이자 부활의 도구


예전에 우리나라 메이저급 시민단체 사무총장께서 말했던 “시민운동을 하려는 자는 가슴 속에 깊은 분노를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격언(!)이 문득 떠오른다. 에릭 호퍼의 텍스트를 읽다보니 그가 말했던 분노는 부조리, 기득권에 대한 합리적 적개심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세계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성적 증오, 파괴본능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의 격정기, 즉 맹신자들이 활개하는 기간이 끝나면 대중운동의 주체는 ‘행동가’의 손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격정적인 시기가 지난 운동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권력의 수단이요 좌절한 이들에게는 아편이 된다.” 


나치나 파시즘처럼 유해한 대중운동도 있겠지만,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대중운동도 있다. 대중운동은 세계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될 수도 있지만, 죽어가는 세계를 소생, 환골탈태시키는 묘약일 수도 있다. 


“광신주의는 유대기독교의 발명품이었다. 세계가 이 영혼의 질병을 얻으면서 사회와 국가를 죽음에서 일으키는 기적의 도구-부활의 도구-도 함께 얻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마지막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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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 책세상. 


부조리 세계와 자살의 유혹… 시지프는 반항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부조리의 개념을 추론하는 첫 장 첫 구절에 대뜸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자살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논리를 펼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초장부터 자살의 화두를 던진 카뮈는 ‘희망의 바다(환상세계=비약의 세계)’와 ‘죽음의 사막(현실세계=부조리 세계)’을 거쳐 신의 노여움을 산 덕분에 끊임없이 바위를 산 정상까지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 ‘시지프’의 투쟁으로 부조리에 관한 긴 여정(텍스트)을 마무리한다.  


‘부조리’와 ‘반항’의 아이콘,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과 더불어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는 그의 부조리 철학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어쩌면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이란 애매모호한 수수께끼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국어사전은 부조리를 철학적 차원에서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 속에 처해 있는 인간의 절망적 한계상황이나 조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상대로 카뮈의 텍스트는 실존철학과 깊은 공범관계를 맺고 있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의 철학자들을 비롯해 부조리의 창조물(예술)로서 샤르트르,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등의 작품이 집중 거론된다. 카뮈는 “부조리란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고 운을 뗀다. 즉, 서로 대립되는 항이 존재함으로써 부조리가 성립되지만, 자살 또는 죽음은 그 등식을 순식간에 무화(無化)시켜버린다. 죽음은 곧 무의미다. 


인간의 기대심리, 욕망 또는 희망, 비전이나 가치 등의 다양한 긍정적 요소와는 사뭇 다른 현실세계, 그것은 뒤틀림의 세계이며 부조리의 시공간이다. 바위를 힘겹게 밀어내는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조리라는 피할 수 없는 동반자와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골병 드는 와중에도, 죽음의 그 순간까지! 카뮈는 그 부조리를 일종의 이혼, 낯설음, 시간 속 죽음에 대한 인식 등의 다양한 개념을 통해 기술한다. 


특히, 카뮈가 부조리 세계를 ‘사막’으로 비유할 때쯤이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바윗돌을 힘겹게 굴려 올리는 고독한 시지프와 모래뿐인 황량한 곳이지만 어딘가에 감추고 있는 우물 덕분에 사막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린왕자는 왠지 통하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 우물이 상징하는 것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신기루는 아닐터. 카뮈가 말하는 열정일지도 모르겠다.    


경험상으로, 지리멸렬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문득 찾아오는 권태와 대면할 때, 시간이 흘러 결국 언젠가는 파괴(죽음)될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할 때, 내가 기대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목격하고 나도 모르게 소외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부조리의 감성이 찾아오는 듯하다. 


어쩌면 돈이 곧 신으로 숭상되고, 무한소비를 통해 위로를 받는 지금의 소비 자본주의 체제만큼 부조리한 세계를 대표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지만, 소비야말로 진정한 아편이며 부조리의 악순환이다.  


부조리를 체감(각성)한 후, 부조리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로 자살이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자살은 부조리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기피하거나 거부(부정)하는 꼴이 돼버려 의미가 없다. 한편, 카뮈는 자살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형수를 등장시킨다. 이는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나는 오직 살아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후세계(내세)에 대한 (강요된) 희망 역시 도피와 다름없다. 카뮈는 이를 투쟁의 기피, 비약, 철학적 자살 등으로 표현한다. 


시지프처럼, 또는 어린왕자처럼 사막이라는 부조리의 공간에서 버티고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결론이다. 카뮈의 말대로 그 투쟁은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며, 이는 ‘반항’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일시적인 반항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지속적인 반항이다. 


역자(김화영)는 《시지프 신화》에 대한 해설로 반항에 ‘자유’와 ‘열정’을 추가한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결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카뮈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명철(명증)한 의식과 반항의 열정이었다. 나는 반항하는 존재인가, 부조리의 톱니바퀴 속으로 회귀하는 자기기만의 존재인가? 흔히 부조리의 담론을 펼칠 때, 사회현상으로서의 거시적인 부조리를 얘기한다. 카뮈의 부조리는 그러한 거대담론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나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는 아르튀르 랭보의 영원한 자기변혁론과 닮아있다.       


카뮈의 철학에 의하면,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이문열의 소설 《젊은날의 초상》에서 「그해 겨울」 편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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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칵테일, 강석기의 과학카페 시즌 4》, 강석기 지음, MID, 2015년.


의학, 식품, 고생물학, 신경과학,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 각 분야의 이슈들에 대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점에서 강석기의 과학카페 시리즈는 자타가 인정하는 ‘추천’ 교양도서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종종 느끼는 경험으로, 지식전달 기능의 전문성과 재미를 유발할 수 있는 흥미꺼리를 두루 갖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어느 수준의 배경지식이 없다면 결국 고리타분한 과학서적으로 전락할 소지가 있고, 흥미 요소에만 집중한다면 교양도서로서의 매력이 조금 떨어질 수 있다.


같은 텍스트라도 독자의 구미에 따라 인상 깊은 구절도 각양각색. 《사이언스 칵테일》에서 첫 번째로 인상 깊었던 파트는 ‘후성유전학’을 다룬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엄마 탓?>이었다. 요컨대 유전이냐 환경이냐의 논쟁, 운명도 유전된다는 결정론적 시각과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유전자도 개선될 수 있다는 담론. 하지만 카오스 이론만큼이나 명쾌한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류는 진보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다. 환경오염과 더불어 유해한 화학물질이 우리 유전자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생인류가 지속적으로 진보한다는 보장은 없고, 공룡이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멸종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듯 지구라는 행성이 멸망하지 않더라도 현생인류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총 9개의 장으로 이뤄진 《사이언스 칵테일》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 중에서 과학적으로 명쾌하고 단호한(!) 결말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사실 거의 없다. 물론, 수영장을 소독할 때 쓰는 염소 성분이 사람들이 분비한 땀이나 오줌(요소, 아미노산, 요산 등)과 화학반응 하면서 만들어진 염화시안, 삼염화아민 같은 분자가 폐와 심장, 중추신경계에 치명적인 손상을 끼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1976년 자이르(콩고)에서 발생한 에볼라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고 확실한 치료법도 아직 개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억명의 사람들이 매일 꾸는 개꿈의 원인도 명확히 알 수 없다. 과학이 갈 길은 멀어 보이고 이런 점에서 ‘첨단’ 과학이라는 말은 매우 건방진 용어처럼 들린다.


이 책은 <바나나 껍질을 밟으면 미끄러지는 이유>처럼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주제에서 토성과 천왕성 사이에 있는 ‘켄타우루스소행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흥미로운 소재들을 두루두루 다루고 있다. 하지만, 《사이언스 칵테일》이라는 제목만큼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예술, 철학 등과 ‘통섭’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어 다소 아쉽다. 


3년 연속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된 ‘믿고 보는 과학책’이라고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이나 《신 없는 우주》의 ‘빅터 J. 스텐저’처럼 과학자의 전문성과 저널리스트로서의 화려한 텍스트를 두루 경험하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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