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자유와 예속의 원류》, 박홍규 지음, 필맥.


배부른 아리스토텔레스… 거지를 자처한 디오게네스


알렉산드로스가 디오게네스 앞에 서서 “나는 대왕인 알렉산드로스다”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나는 개(犬)인 디오게네스다”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왜 개로 불리느냐고 묻자 “무엇인가 주는 사람들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짖어대고, 나쁜 자들은 물어뜯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이건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라”고 대답했다. 


어릴 적 텔레비전, 만화 같은 데서 얼핏 본 듯한 장면이다. 현재,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의 저서는 한 권도 존재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박하고 자족적인 생활, 권력이나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참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화폐 폐지를 주장했는데, 아마도 자연과 함께 하며 자족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적 이상사회와 깊이 연결돼 있는 듯하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디오게네스’를 입력해보니 그의 철학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설명한 책은 오직 한 권뿐이었다. 아나키스트 박홍규가 쓴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자유와 예속의 원류》였다. 물론 《디오게네스는 왜 행복할까?》라는 책도 있었는데 어린이를 위한 그림 동화책이다. 박홍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대편에 바로 ‘디오게네스’로 대표되는 자유, 자족, 무욕의 철학이 있다고 분석한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을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과도 깊이 연결시킨다.


즉, 노예출신 디오게네스야말로 자율주의(자유주의, libertarianism),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선구자라는 것이다. 누구로부터의 억압을 거부하고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한 자율주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 전체 세계의 시민이라는 세계시민주의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인종적 우월의식, 제국주의 등을 타파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의 철학, 초창기 기독교의 메시지와도 부합된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자타의 차별을 없애고 사람을 널리 서로 사랑(겸애)하라고 전파한 묵자(墨子)의 사상과도 비슷해 보인다. 


박홍규의 말대로 홈리스, 거지, 개와 같았던 디오게네스에 비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을 잇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대학에서 철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전공수업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정치사상가들이 이들이다.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야말로 현재의 신보수주의, 네오콘(Neo-conservative)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글로벌리즘, 또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그들의 사상은 시장질서, 자유로운 자본이동, 다양성과 상충되는 문화통합을 강조한다. 미국 신보수주의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늘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 “돈이 곧 정의”


이른바 인민재판을 받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철인정치를 부르짖은 플라톤, 정복자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을 자처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엘리트정치, 귀족정치, 소수의 지배를 강조한 꼴통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정치를 줄기차게 강조한 성리학자들과 묘하게 매칭된다. 박홍규는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분배·교환적 정의)은 돈이 최고, ‘돈이 곧 정의’라는 결말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들의 사상은 초인을 외친 니체, 나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칼 슈미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네오콘을 거쳐 한국의 꼴통들에게도 주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계승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덕’을 강조하고 있다. 박홍규는 미덕 중심의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유, 자율적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라고 지적한다. 샌델의 저서가 불티나게 팔린 데에는 이명박의 공로가 지대하다. MB가 국정지표로 공정사회를 내걸며 샌델의 저서를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기존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정의론과 별반 다른 게 없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돌풍현상은 정의에 굶주리고 공동체 파괴에 허탈감을 느낀 한국인들의 허기를 자극했기 때문이 아닐까.


박홍규는 자유와 평등, 무욕과 평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디오게네스 철학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자연과 함께 하는 자치사회를 지향했다고 결론 맺는다. ‘가난한 유토피아’가 사실은 진짜 풍요로운 유토피아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사회가 있다면, 어딘가에는 이를 위해 희생한 빈곤과 굴종의 사회가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부(富)와 힘(권력), 그것이 곧 선이고 평화이며, 전문가·엘리트들이 정치사회(공동체)를 지배하는 사회가 좋은 국가라는 것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참모습이다. 


권력가, 자본가들이 흔히 주장하는 이론 중 하나가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이다. 이는 민주주의, 복지사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허상이며, 부자들의 아전인수, 조삼모사의 간계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철인정치, 이데아 사상과 비교되는 철학자로서, 민주주의자이며 고대 원자론을 완성했던 데모크리토스의 말은 엘리트주의자, 국가주의자, 인종우월주의자, 심지어 부자가 정치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권력지향형 자본가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반박처럼 들린다.


“시민정(민주정) 하에서의 가난이 엘리트정이나 군주정에 보통 수반된다고 하는 번영보다 낫다. 그것은 자유가 노예보다 좋은 것과 같은 이치다. 현자는 모든 국가에 속한다. 왜냐하면 위대한 영혼의 집은 전 세계이기 때문이다.” (본문 133페이지)


※책 정보

Posted by 아나키안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책과 그림과 영혼이 하나된 사람의 이야기』, 박홍규, 해너머, 2014.


위대한 영혼에게 한 발 더 다가가는 안내서


시서화(詩書畫), 시와 글씨와 그림, 언제나 그렇듯 글과 그림은 제법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화가와 독서’는 왠지 입에 쫙 달라붙는 맛이 없다.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대체로 시서화는 교양인, 보통인, 취미의 이미지가 강한 반면에 화가와 독서, 특히 ‘문학과 미술’은 전문가, 직업인(쟁이)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독서는 붓과 캔버스, 펜과 원고지만큼이나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처럼 들린다. 국내외에서 반 고흐만큼 지속적으로 소비되고 관련서적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화가도 흔치 않은 듯하다. 그만큼 고흐의 삶과 그림은 현대인들에게 진한 호소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화가, 미술전문 아카데미와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반 고흐가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림을 통해 이웃들과 소통한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한국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박홍규 교수는 반 고흐의 삶과 더불어 그가 읽고 감동받은 책들을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중심으로 집중 조명했다. 저자는 빈센트 반 고흐를 ‘동서양을 초월한 아나키 유토피아의 사상가이자 그것을 표현한 화가’로 평가하고 있다. 빈센트에게 삶의 목적은 자연과 교류하며 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신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빈센트는 자본주의를 부정한 비폭력 사회주의자, 마을 공동체주의자, 아나키 유토피아주의자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가 사랑한 종교철학책으로는 ‘성경’이 제일 먼저 발견된다. 하지만 그는 제도권 교회의 횡포와 비인간성에 환멸을 느꼈다. 빈센트는 예수를 완전한 이상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로 평가한 르낭의 저서 <예수의 생애>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외에 버니언의 <천로역정>,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 빈센트가 가장 사랑한 화가 밀레의 전기 <장 프랑수아 밀레의 삶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는 신의 섭리를 교회가 아닌 자연(농촌)과 더불어 노동자, 농민, 창녀, 광부 등 가난하고 버림받은 계층에 대한 애정을 담아낸 예술에서 찾고자 했던 것 같다. 빈센트 스스로 가장 걸작이라고 말한 <감자 먹는 사람들>은 ‘농민 화가’ 빈센트의 철학과 사상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저자는 반 고흐가 사랑한 시인으로 낭만주의 시인 키츠, <별이 빛나는 밤> 등의 밤그림을 연상케 하는 시를 쓴 롱펠로, <풀잎>의 휘트먼, 독일의 국민시인 하이네, 대문호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세계를 설명한다. 빈센트가 사랑한 프랑스 문학으로는 미슐레의 <사랑>과 <인민(민중)>, 볼테르의 <캉디드>, 발자크의 <시골의사>,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사형수 최후의 날>, <93년>, 졸라의 <사랑의 한 페이지>, <제르미날>, <작품>, <목로주점>, 로티의 <국화부인>, 모파상의 <벨아미>, <피에르와 장>,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세>, 공쿠르 형제의 <마넷 살로몽>, 도데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 등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반 고흐가 사랑한 영문학으로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칼라일의 <의상철학>,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어려운 시절>, <두 도시 이야기>,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 <사일러스 마너>,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 등과 함께 빈센트가 그린 다양한 그림들이 어우러진다. 고흐가 대체로 높이 평가한 책들의 면면을 보면, 권력화된 기성 종교를 비판하고 핍박받는 민중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드러낸 종교서적, 정치경제적 진보와 더불어 인류의 도덕적 깨침을 강조하는 철학서적들, 자신의 삶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던 작가들과 그와 비슷한 주인공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작품, 무엇보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하며 숭고한 정신을 실천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무척 사랑한 듯하다.


고흐가 사랑한 책들 중에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가의 작품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저자는 빈센트가 읽은 수많은 책들 중에 다섯 권은 꼭 읽어보길 권유한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의미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미국 노예해방의 계기가 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하나의 패키지로 제안한다. 빈센트 역시 두 책을 너무나 좋아해 자신의 그림 <아를의 여인(1890)>에 그려 넣기까지 했다. 세 번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이다. 두 작품 모두 노동자의 저항을 다루고 있다. 박홍규는 그 저항이 정치적 혁명으로 표현된 것이 <레미제라블>, 경제적 파업으로 나타난 게 <제르미날>이라고 분석한다. 

▲2006년 9월 동대문시장. 공사장 칸막이에 그려진 반 고흐의 작품이 시장풍경과 묘하게 어울려 촬영했다.[사진=아나키안]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한 농민 화가


그리고 이러한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보여주는 것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라고 매듭 짓는다. 저자가 말하듯 고흐는 “밥을 먹듯이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과부를 사랑하고 버려진 여인을 사랑하고 구빈원 노인들을 사랑하며,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고 그만큼 상처받고 아파하고, 궁극적으로 예수와 부처 같은 최상의 예술가를 꿈꾸다가 동생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또, 고흐는 “농부가 평생 땀 흘려 밭을 일구듯이 자신은 캔버스를 일군다.”고 말한바 있다.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은 독서에 있어서 자신만의 일가(一家)를 이룬 지식인, 박홍규의 깊은 내공과 더불어 고흐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이 가슴으로 전달되는 책이다. 또한, 그간 피상적으로 전시되고 해석됐던 반 고흐의 삶과 그의 그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북과 같은 책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현대미술사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화가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가난과 힘든 노동에 죽살이치고, 깊은 상처와 소외에 몸부림치는 밑바닥 이웃들과 함께 하다 죽은 또다른 이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를 반 고흐에게 부여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Posted by 아나키안


내 서재의 4대 천왕들… 마광수, 강준만, 박홍규, 유시민


문학에서는 마광수, 미디어에서는 강준만, 철학에서는 박홍규, 사회과학에서는 유시민이 내 책장의 단골손님이다. 간혹 뜨내기손님들이 변변치 못한 서재를 두드리기도 하지만 내 독특한 뇌구조를 좌우할 정도는 아니다. 돌이켜보니 장르나 분야가 조금씩 다르고 색깔도 각양각색이지만 공통점은 ‘반골’ 기질이 다분한 저자들이다. ‘반골’이란 말이 예전에는 좋은 말인 줄 알았는데 살다보니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걸 몸소 깨달았지만…  


이들 나만의 4대 천왕 중에서도 단연 으뜸가는 반골은 아마도 마광수와 박홍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자유주의’, 또는 ‘개인주의’와 관련한 논문 소재를 찾는다면, 마광수와 박홍규의 저서는 문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은 훌륭한 안주거리가 될 것 같다. 물론 다른 점도 많지만 은근슬쩍 비슷한 구석도 있어 상당히 재미있는 분석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란 무엇인가>는 다소 상투적이고 지루한 제목이지만 내용은 전혀 진부하진 않다. 물론 진부하다고 해서 틀린 의견이고, 진보가 항상 진리인 것도 아니지만, 자유에 대한 색다른 접근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정독할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박홍규는 기존의 자유론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거론되는 두 가지 접근법, 소극적 자유(~으로부터의 자유)와 적극적 자유(~에로의 자유)를 해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분법적 자유론은 자유와 평등의 합치될 수 없는 평행선처럼, 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끝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깊은 미로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구나 정치사회적 현실에서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명확한 구별을 하기가 쉽지는 않다.


박홍규는 민주주의의 핵심가치, ‘자유’와 ‘평등’의 강도(强度)나 방향성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주체를 3개 영역으로 나눠 다시 통합하는 방식을 취했다. 노예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의 자유, 인민자결권을 향한 인민의 자유라는 세 가지 차원을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개인의 자유에는 신체, 사상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시민의 자유는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융합된 ‘자치의 자유’, 인민의 자유는 (제국주의) 침략 등에서 독립된 자주·독립을 의미한다. 이 세 요소 중에 인민의 자유가 주춧돌이다. 인민의 자유가 선결되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유 3단계, 자존-저항-창조


가장 인상 깊었던 논리는 이른바 ‘자유의 3단계’. 자유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자존(自尊)’에서 출발한다는 것. 자존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저항’이다. 저항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 바로 ‘창조’다.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궁극은 바로 ‘창조’에서 나온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외쳐댄 ‘창조적 파괴’도 어쩌면 자유에 대한 의지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홍규가 말하는 자유 시스템은 개인, 집단, 인민의 자유가 상관(相關)되어 작동해야 한다. 그는 자유를 “존엄성(자존심·품위)을 갖는 인간이,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고유한 잠재능력을 증진시켜 타인에 의한 어떤 억압이나 간섭이나 지배(그런 것들이 있으면 저항하고 투쟁해) 없이(평등) 타인과 상관하여(박애) 자신이 희망하는 삶을 창조(자치·자연)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쉽게 말해 ‘타자와 함께 하는 자유’야말로 진짜 자유라는 것. 


결국, 박홍규의 자유는 그가 기존 저서에서 끊임없이 얘기했던 자유, 자치, 자연이라는 아나키즘적 요소로 귀착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작금의 자유는 소수 우익 부자들만의 것이 돼버렸고, 자유는 ‘소유’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 없으면 자유도 없다.’ 


독재라는 물리적 쇠사슬과 폭력으로부터는 벗어났으나(물론 지금도 잔존하고는 있지만) 이는 다양한 방식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쇠사슬로 대체됐을 뿐이라는 그의 지적을 통감하며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타인의 자유(또는 부자유)와는 상관없는 나의 자유는 진짜 자유인가? 그리고 자존의 박탈 위기에 몰린 나는(또는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지금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가?”


자유란 무엇인가 - 8점
박홍규 지음/문학동네


Posted by 아나키안

『독서독인(독서는 인간을 어떻게 단련시키는가)』, 박홍규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4.1.17.

 

참된 독서란 무엇인가?

 

<독서독인(讀書讀人)>을 읽으며 ‘참된 독서’라는 것이 과연 무언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박홍규 교수는 “독서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고 좀 더 자유롭고 비판적인 독서가 필요하다”며, “참된 독서인은 반권력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시 서적, 수험서, 교과서,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 등은 결코 독서가 될 수 없다. 그냥 공부일 뿐이다. 심지어 교수나 전문가들이 전공 관련 서적을 읽는 것도 독서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저자의 분석대로 한국은 전통적으로 수백 년 동안 획일적인, 기획된 교과서만 공부하는 나라이다. 유교경전 무조건 외워서 시험(과거시험) 보는 것이나 법조문은 물론 케이스(판례)까지 토시 하나 안틀리고 외워대는 공무원시험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주입식 교육)은 별로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사회지도층 중에 자유롭고 비판적인 독서를 제대로 했던 사람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며, 암기 잘하는 사람이 성공해 권력까지 잡는 세상이다. 더구나 성공해서 다양한 책들을 읽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한국에서의 (가짜) 독서는 등용문을 통과하기 위한 출세의 수단일 뿐이다.

 

“제대로 된 책은 현실을 혁명하라 한다”

 

권력지향의 무비판적 독서가 아닌 사고의 다양성을 통해 반권력의 지성을 회복하는 독서인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혁명가도 탄생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독서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참된 독서를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변화를 지향하게 되며, 제대로 된 책들은 현실을 혁명하라고 가르치기에 참된 독서인은 혁명가가 된다는 그의 웅변을 논술시험을 준비하거나, 도서관에서 취업/고시 공부하는 이들에게 설파하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권력이 창조한 지식을 상징하는 교과서를 달달 외운 멍청한 엘리트들이 결국 국민 전체의 지성을 결정하고 관리하고 규제하는 악순환의 현실에서 다양한 책읽기 과제는 한반도 통일 과업보다 힘들어 보인다.

 

권력과 반권력 사이에서 독서인을 찾다

 

이 책은 저자가 ‘독서독인’이란 제목으로 월간 ‘인물과 사상’이라는 잡지에 연재한 글들을 수정·첨가해 펴낸 것이다. 총 20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권력과 반권력이라는 두 파트로 나눠 그들의 독서 행태 분석을 통해 현실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독서로서 자유롭고 비판적인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제1부에 나오는 권력을 훔친 자들(나폴레옹·링컨·레닌·스탈린·히틀러·괴벨스·무솔리니·마오쩌둥·호찌민·폴 포트)의 독서 이력은 그들이 가졌던 강력하고 화려한 정치권력에 비해 볼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광이었던 히틀러의 독서가 나폴레옹, 이순신을 숭배한 박정희의 독서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성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만든다. 특히, “『이순신』을 읽은 자가 일본군에 자진 입대했다는 점을 나는 어려서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는 구절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링컨은 당시 미국인 엘리트처럼 평생 제국주의와 식민정책을 지지하고 실천해왔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 있다. “(변호사)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해방 선언은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였다”는 사실이 아연실색케 한다.

 

혁명 정신은 도서관에서 잉태된다

 

“도서관은 모든 사상의 산실이다. 특히 사회주의를 비롯한 모든 공공 사상의 실험실이다.

그리고 지식을 사유가 아닌 공유로 갖는 곳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공유에 있지 사유에 있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은 아름답다.

외양이 화려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적 모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아름답다.” <본문 63페이지>

 

고독한 사상가 마르크스, 붉은혁명을 주도한 레닌, 자유로운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혁명사상을 키우고 완성시킬 수 있었던 궁극의 산실이 민중집회나 토론회, 강연회 등이 아니라 외로운 감옥과 도서관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혹독한 차르 전제군주 시대에도 감옥에서 맘껏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쓸 수 있었고, 심지어 군대에서도 자유주의 신문을 구독하고 엄청난 지적 탐구에 매진했다는 크로포트킨의 경험은 아직도 불온서적의 딱지를 붙이며 무식한 작태를 선보이는 21세기 문화강국 대한민국과 극단적으로 비교된다.

 

“여기서 혁명가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떼거리 우두머리와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데모도 음모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오로지 독서실의 남자였다.
그러나 교과서나 교리문답을 외운 외골수 바보는 아니었다.” <본문 189페이지>

 

무엇보다 도서관, 독서실하면 마르크스가 빠질 수 없다. 반평생이 넘는 34년을 망명지 런던에 살며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영국박물관 독서실을 거의 매일 출근했다고 한다. 당시 자본주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혁명사상이 담긴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은 저자 말대로 “돈으로 구속과 차별을 만드는 자본주의 본산에서 유일하게 자유와 평등이 온전했던 곳이 독서실이었다. 그래서 독서실은 세상에서 유일한 사회주의의 전당”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1부에 나온 독재자들에 비해 2부에 등장하는 권력에 맞선 자들(마르크스·크로포트킨·톨스토이·간디·루쉰·프리다 칼로·체 게바라·스콧 니어링·만델라)의 독서는 질적인 면도 그렇지만 양적인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방대한 독서노트를 작성한 체 게바라의 혁명은 자유롭고도 철저한 독서에 의한 교양에서 비롯됐다.

 

체 게바라처럼 참된 독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그 자유롭고 비판적인 독서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게 한다. 그 과정에서 굵직한 혁명가도 탄생한다. “혁명가가 사라진 세상은 그야말로 말세다. 세상의 나쁜 점을 알고 분노하는 사람이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는 그런 분노에서 출발한다” (본문 291페이지)


※저자 박홍규 저서


[저자 관련 포스팅] 

2006/01/11 - [My Text/Book] - 베토벤 평전

2005/12/16 - [My Text/Book] - 의적, 정의를 훔치다/ 박홍규

Posted by 아나키안


박홍규, 『베토벤 평전』, 가산출판사, 2003.


서양 고전음악의 기본인 소나타 형식을 완성하고 그 전형인 교향곡을 완전한 것으로 만든 서양음악의 완성자, 심지어 음악의 성인,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천재가 결코 아니었으며 모차르트처럼 귀공자 스타일도 아닌,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추남으로 유명했으며 돈, 애욕 등의 온갖 욕망 속에서 갈등과 절망을 반복한 음악가였다.


저자는 베토벤을 심지어 부랑자, 늑대 등의 발칙한 용어로 비유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베토벤의 삶이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처럼 전혀 클래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듯 하다. 


박홍규의 베토벤 평전은 온갖 음악 전문 용어를 남발함으로써 우리를 넉다운 시켜 음악의 본질에서부터 소외시킨 클래식 전문가들이 갈겨댄 무미건조한 책들과는 전혀 다른 재미와 흥미를 주는 것 같다.


알고 듣듯, 모르고 듣듯 음악의 본질은 느끼는 것이라는 저자의 항변이 가슴에 와닿는다. 말로 시부렁거리지 말고 몸으로 느껴!


<인상깊은 구절>


일제시대에 일본은 물론 조선에서도 베토벤의 음악은 자주 울려 퍼졌다. <영웅>은 군인정신으로, <운명>은 팔자 타령으로, <전원>은 초가집 예찬으로, <합창>은 대동아 공영권의 주제가로 연주되었다. (P.7)


부랑배는 부랑배 자신 이외에 누구도 지배할 수 없다. 그 정도가 아니면 부랑배가 아니다. 두목에게 굽실거리는 얌생이나 깡패는 부랑배가 아니다. 부랑배는 한마리 늑대이다. 그를 지배하는 사람도, 그를 따르는 사람도 있을 수 없다. (p.9)


가장 소란스러운 재즈나 헤비메탈도 베토벤의 음악, 예컨대, <레오노레 서곡>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헤베메탈의 원조라고 부른다. 헤비메탈이 노동자 음악이듯 베토벤은 노동자 음악이다. (p.10)


음악의 내용, 음악의 본질은 느낌이다. 좋은 느낌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위 음악 전문가들이여, 제발 우리로 하여금 음악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말라. (p.13)


그는 음악으로 세상을 저주했고, 조롱했으며, 분노했고, 절망하다 마침내는 초월했다. (p.21)


모차르트는 만년에 계몽주의에 기울었지만 어디까지나 반바지를 입은 궁전의 하인배였다. 하이든도 그랬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미 스무살 무렵부터 반바지를 집어던지고 긴바지를 입었다. 긴 바지는 프랑스 혁명에서 등장한 하층계급 공화주의자의 상징(상큐로트)이었다. (P.29)


베토벤은 아기자기한 금강산에는 맞지 않다. 그곳에는 모차르트가 어울린다. 그러나 지리산 꼭대기 천왕봉에서 거대한 산맥들을 내려다보며 듣는 음악은 역시 베토벤이 제 맛이다. (p.33)


"자유로운 1년은 압제의 1세기보다도 인류에게 유용하다" -슈나이더 (p.107)


그들의 음악을 '고전적'이라고 우리가 평가하는 것은 당시 빈 음악의 진부함과 장대함이라는 양극단을 배제하고 계몽주의가 추구한 유토피아를 음악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리성과 유희성, 그리고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새롭고도 드높은 가치를 상징한 자기 충족적인 세계의 창조였기에 참된 고전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p.128)


"예술가는 불같이 격렬하게 타오르며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베토벤 (p.160)


"아, 나는 이 불행 가운데서도 행복지려고 노력하겠네, 아니야, 나는 견딜 수 없어. 운명이라는 놈의 목을 졸라 버리겠네. 운명은 결코 나를 꺽지 못해. 오! 삶은 너무나 아름답군. 천번이라도 다시 태어나 살고싶어! 이제 적막한 삶에 머무를 수 없어!" -베토벤 (p.178)


"인간이 영웅을 숭배하는 한 영웅은 언제나 등장하여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헉슬리 (p.197)


베토벤은 막강한 권위를 갖는 사람에게 종속하는 삶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유럽의 봉건 군주를 타도한 나폴레옹에게 매료되었으나, 그가 본질적으로 그런 해방자가 아님을 알자 그를 배신한 것이었다. 따라서 '영웅' 교향곡은 그런 갈등을 표현한 것이었다. 현실세계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웅주의의 꿈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p.209)


"건전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 -베토벤 (p.258)


음악감상이란 음악만을 듣는 것이지 다른 일을 하면서, 또는 다른 생각을 하며 음악을 장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음악만을 들어야 한다. (P.312)

베토벤 평전 - 10점
박홍규 지음/가산출판사

'My Text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영복, 강의  (0) 2006.02.06
프라하의 이방인, 카프카  (0) 2006.01.16
베토벤 평전/ 박홍규  (0) 2006.01.11
조선의 뒷골목 풍경  (0) 2006.01.05
적대적 공범자들  (0) 2005.12.29
약산 김원봉  (0) 2005.12.26
Posted by 아나키안




의적, 정의를 훔치다 - 10점
박홍규 지음/돌베개

『의적, 정의를 훔치다』, 박홍규, 돌베게, 2005


국어 사전에 의적은 "부정으로 치부한 사람의 재물을 훔쳐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의협심이 많은 도둑"으로 정의한다. 의적에 대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역사가 홉스봄의 의적 연구는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농민들의 소극적 저항 또는 비적 행위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연구 대상과 시기에 있어서 산업 자본주의 이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서도 해적, 도시반란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연구 범위를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의적이라 불리는 실존 인물 중에서 민중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신사적이고 의협심이 강한 도적은 찾기가 힘들다. 문제는 그러한 도적들을 향해 민중의 희망이 투영되어 재창조되어 진 것이 바로 의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의적에 대한 역사적 사실 진위 여부를 분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민중의 간절한 소망이 그들에게 스며들어 비춰진 의적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빈부격차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다르며 권력의 추잡함이 극에 이르는 혼란스런 세상에 먼저 등장하는 것은 의적이라 불리는 무법자, 비적떼들이다. 혁명가, 개혁가...등은 그 이후다. 홉스봄이 말하는 그 원초적 반란자들은 유사 이래 끊임 없이 출몰했다. 민중은 지배자, 착취자들, 즉 합법적 도둑놈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복수하는 비합법적 도둑놈들을 좋아한다. 이는 곧 의적들이 민중들의 불만을 대신 풀어주는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인상깊은 구절


궁극적으로 의적은 없어져야 한다. 민중들이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적 이야기가 여전히 등장하는 것은 우리 현실이 그 만큼 부조리 하기 때문이 아닐까? (5페이지)


"우크라이나와 볼세비키 권력간의 협정을 저버린 트로츠키는 우리와 싸우라고 적군을 파견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크론슈타트에서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혁명의 역사는 언젠가 정복자들, 즉 러시아 혁명의 파괴자들을 반혁명 분자로 선고할 것이다" -마흐노- (109페이지)


해군에서 부상당한 수병들은 해변에 버려져 구걸하다 굶어 죽었던 반면, 해적들은 동료들을 돌봤다. (130페이지)


"술을 마시되 취하지 말고, 사랑하되 감정에 매몰되지 말라. 마지막으로 훔치되 부자들의 것만 건드려라" -판쵸비야 (154페이지)


"전사다운 죽음이라면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다만 무방비 상태의 개처럼 죽고 싶지 않을 뿐이다" -빌리 더 키드- (241페이지)


의적은 정의를 추구해야할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반인간적인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저항자, 반항자, 이방인, 아웃사이더로 인식된다. (244페이지)


"의적은 항상 민중의 영웅이고 보호자이자, 복수자이다. 그는 국가나 사회제도 혹은 시민제도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자이며, 국가, 귀족정치, 관료제, 그리고 교권문화에 대항하여 생사를 무릅쓰고 싸우던 투사이다" -바쿠닌- (287페이지)

'My Text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대적 공범자들  (0) 2005.12.29
약산 김원봉  (0) 2005.12.26
의적, 정의를 훔치다/ 박홍규  (0) 2005.12.16
반역아 미하일 바쿠닌/ E.H.카  (0) 2005.12.09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0) 2005.11.30
마광수,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1) 2005.11.29
Posted by 아나키안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내 몸에 새겨진 언어와 관점의 파편들...
아나키안

공지사항

Yesterday16
Today9
Total172,471

달력

 « |  » 2019.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