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 스포츠, 야구의 진수


투수와 타자의 1:1 도박 ‘원아웃’ 게임. 포볼 또는 투수의 공을 외야로 날리면 타자 승리, 삼진이나 내야땅볼이면 투수 승리. 일본의 만화 잡지 ‘비즈니스 점프’에서 카이타니 시노부가 연재한 스포츠 만화 ‘원아웃’(ONE OUTS)이 애니메이션(감독: 사토 유조)으로 제작돼 2008부터 TV로 방영됐다. 원아웃은 멘탈 스포츠의 대명사로 불리는 ‘야구’의 요소를 드라마틱하게 구현했다.


시속 120km 안팎의 오직 직구만 던질 수 있는 주인공 ‘토쿠치 토아’. 그는 원아웃 게임의 무패를 자랑하는 오키나와 지역 길거리 투수. 뛰어난 제구력과 타자의 심리를 꿰뚫는 마운드 위의 통찰력은 리카온즈의 4번타자 ‘코지마 히로미치’의 눈에 띈다. 시즌 성적이 언제나 바닥권을 맴돌던 리카온즈는 토쿠치 토아의 영입을 통해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무엇보다 원아웃은 기발한 게임전략과 승부수로 야구팬들을 흥분시킨다.


리카온즈의 구단주 ‘사이키와 츠네오’는 구단 성적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금전적 수익에만 집착하는 최악의 자본주의 쓰레기 캐릭터. 야구 경력이 없는 주인공이 구단주와 맺은 이른바 원아웃 계약. 아웃 한 개(원아웃)를 잡으면 토쿠치 토야는 연봉을 대신하는 일정한 돈을 받지만 실점하면 오히려 구단주에게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리카온즈 감독 ‘미하라 유자부로’는 무능력의 극치를 달리며 구단주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강아지와 다름없다. 


원아웃은 야구 게임의 규칙과 기술을 조금이나마 하는 야구팬들에게는 거의 열광의 도가니를 선사하는 중독성 짙은 작품으로 보인다. 온갖 치졸한 짓을 서슴지 않는 구단주를 역으로 엿 먹이고, 사인 훔치기, 너클볼 조작, 도청 등 상대팀의 갖은 편법과 변칙 플레이를 와해시켜버리는 토쿠치 토야의 기상천외하지만 야구장에서 충분히 있을법한 상황 설정은 원아웃이라는 작품이 갖는 매력 중 하나다.


덕아웃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어대고, 감독에서 오히려 지시를 내리거나 농구 게임처럼 수시로 타임아웃을 걸어 작전을 짜는 모습, 악덕 기업주처럼 묘사되지만 왠지 허당끼가 다분한 구단주와 감독의 코믹한 표정, 개성 넘치는 야구선수 캐릭터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리듬감 넘치는 유머… 


야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도박 애니메이션 원아웃은 거스를 수 없는 시스템에 갇힌 사람들에게 통쾌한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졸(卒)의 역할을 수행하다 팽 당하면 그만인 소모품들이 오히려 바둑판의 대마를 움직인다. 그라운드 위의 졸들이 야구판을 조종하는 빅브라더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역의 역사가 원아웃이라는 작품에서 구현되고 있다.


[원아웃 오프닝 영상]

Posted by 아나키안


골수팬과 예비선수를 위한 『야구교과서』, 잭 햄플 지음·문은실 옮김, 보누스, 2009.


야구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딱 한 가지 있다. “알 길이 없다”
: 호아킨 안두하르(전 메이저리그 투수)

흔히들 야구를 인생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셀 수 없는 다양한 돌발변수들이 많을 뿐더러, 무엇보다 감정(mental sport)이 경기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런듯하다.

메이저리그 전문가 잭 햄플이 쓴 <야구교과서>는 미국 야구에 기반하고 있어 영어로 된 생소한 전문용어와 약어가 많아 웬만한 메이저리그 마니아가 아니라면 고리타분한 야구전문서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야구의 기초이론과 원리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가 더 나을 법하다.

1845년에 현대식 야구장을 고안하고 광범위하게 사용된 야구 규칙서를 출판한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야구를 발명한 사람으로 공식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 미루어 본다면, 야구라는 스포츠가 다른 종목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축구와 더불어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게 된 것은 특유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단지 자본주의의 중심, 돈 많은 세계패권국 국민들이 좋아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구기종목 중에 구질의 종류만 10개가 넘는 종목은 오직 야구뿐이다. 패스트볼(fastball : 포심·투심·컷/커터·싱커·라이징),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릿핑거(스플리터), 너클볼, 스크루볼, 스핏볼, 이퍼스, 자이로볼… 몇몇 금지된 구질과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구질을 제외하더라도 한 경기에서 모든 구질을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 미친 투수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여기에 각종 타격기술, 선수 로테이션, 주루 플레이, 수비 포메이션, 사인, 감독의 전략·전술, 전반적인 규칙들과 수학보다 복잡하게 보이는 통계수치 등 야구라는 종목을 머리로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솔직히 그럴 필요도 없다. 아마 프로선수들 중에도 야구용어와 규칙, 전술, 통계계산법을 100% 아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 관심과 의지가 있으면 머리는 자동으로 따라간다는 진리를 어릴적 브라보콘 속에 보너스로 들어있는 야구카드(딱지)를 모으며 체득했다. 하지만, 기록원이나 특정팀 스토커가 아닌 이상 스코어 카드에 두 눈 부릅 뜨며 들이대는 과도한 성실성을 보일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야구는 지루한 정신에게만 지루하다"

“야구는 지루한 정신에게만 지루하다”고 말한 아나운서 레드 바버의 말이 도발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실 기본적인 룰을 알고 경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감각만 있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정중동 동중정’의 매력적인 운동이 야구다. 다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눈에 쉽사리 보이지 않는 미세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배경지식을 갖춘다면, 2시간이 훌쩍 넘는 야구경기가 더욱 재미있게 보일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야구 규칙을 잘 모르지만 다른 관점과 흑심에서(?) 어떤 선수를 격하게 좋아해 야구장을 자주 찾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본규칙을 체득하게 되는 경우는 너무 흔해빠진 (모범)케이스다. 오직 그 선수 때문에 오든, 이상하게 야구장에서 더 맛있는 치킨과 맥주 때문에 오든, 미친놈처럼 그냥 꽥꽥 소리 지르고 싶어서든, 이유야 어찌됐든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기 때문에 야구장에 오는 것이 아니겠나.

로저 클레멘스가 몇 번 사이영상을 수상했는지,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수비하는 ‘테드 윌리엄 쉬프트’, 2루 주자의 3루 진루를 막기 위해 1·3루수가 홈플레이트에 돌진하는 ‘휠 플레이’라는 용어를 모르더라도 야구를 이해하고 즐기는데 전혀 하자는 없다. 무지 잘 맞은 타구는 야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 아웃 당하고, 애매한 타구가 버뮤다 트라이앵글에 떨어져 안타가 됐을 때 그걸 바가지 안타로 부르든, 텍사스 히트라 부르든, 행운의 안타라고 기뻐하든, 빌어먹을 안타라고 저주하든 즐겁거나 짜증나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야구의 진정한 매력은 “야구에서 따 놓은 당상 따위란 없다”는 공평한 평등 이념 속에 자유의지에 바탕한 예측할 수 없는 지뢰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느닷없이 폭발하는 불확정성의 원칙이 필드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개그맨이 대부분의 구기 종목은 공이 들어가야 점수를 따고 승리하지만, 야구는 공이 아니라 사람이 집(홈)에 들어와야 이길 수 있는 휴머니즘 스포츠라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야구에 교과서가 과연 존재하는 지 모르겠다. 우리네 인생에 모범답안이 없듯이 야구에도 정석은 없다고 생각한다. 변화무쌍한 야구의 세계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야구 바이블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확신한다.

※ 재미있는 구절:

“나는(짐 컨: 텍사스 레인저스 구원투수)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감독이 말했다. ‘그렇겠지, 그런데 외야수들은 확실히 힘들어하고 있어.’ ” [본문 50페이지]



※ 관련 포스2009/05/17 - [My Text/Book] - 야구란 무엇인가

Posted by 아나키안


야구의 첫번째 화두, '공포'
예술의 경지로 승화된 과학적 스포츠


레너드 코페트/이종남 역, 『야구란 무엇인가』(The new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 황금가지, 2009.


1845년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최초로 야구 규칙을 만듦. 1846년 9명이 한팀이 되어 경기가 운영되도록 규칙이 재정비. 같은해 '니커보커'가 야구 경기를 처음 시작. 1871년 미국 프로야구 탄생. 1884년 오버핸드스로 투구 가능.(기존엔 언더만 가능) 1887년 스트라이크 존 도입. 1888년 스리 스트라이크 아웃 도입. 1893년 투구거리 60피트 6인치(18.44m)로 늘림. 1895년 인필드플라이 규칙 제정. 1900년 변화구 스트라이크 판정을 위해 홈플레이트가 오각형으로 바뀜. 1901년 아메리칸 리그 결성(내셔널리그와 함께 2대 리그 체제 갖춤). 1936년 뉴욕 쿠퍼스타운에 명예의 전당 개관.


수많은 현대 스포츠 중에서 야구처럼 두통을 일으킬 만큼 복잡한 규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흥행, 상업성이 뛰어난 스포츠는 없는 듯하다. 1973년 아메리칸 리그에서 수비는 하지 않고 타자 역할만 하는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것을 빼곤 야구 규칙은 1903년 이래 근본적인 변화 없이 지속되어왔다. 야구는 오랫동안 세계인들의 애정 세례를 받아온 축구와 함께 남녀노소 불문하고 엄청난 수의 고정팬을 보유한 강력한 권력자다.


야구는 지극히 과학적인 원리와 규칙들이 적용되지만 미묘한 심리적 요소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또한 미식축구나 농구처럼 몸싸움이 거의 없지만 치고, 뛰고, 던지고 받으며 미끄저지는 다이나믹한 요소가 곳곳에 숨어 있고 골프나 당구처럼 정교한 타격과 현란한 투구 테크닉이 수반된다. 위기 상황 때 강타자를 헛스윙으로 아웃시키거나 예상치 못한 타자가 담장을 넘겨버리는 홈런 연출은 야구라는 스포츠를 영화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종합 예술로 격상시킨다.


하지만 야구는 스타급 선수가원맨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팀웍(조직력)이 잘 된 팀이라고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특히 복싱이나 레슬링 등의 격투기처럼 불굴의 파이팅 정신이 충만하다고 해서 관중들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냉혹한 스포츠이며 어이 없는 순간의 실수(에러, 보크, 폭투 등등)나 행운(날씨, 심판판정, 조명, 잔디 등등)이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야구에는 인생처럼노력, 행운(운명)...필연과숙명의 요소가 공존한다.


60년 동안 야구 기자로 활동하며 야구와 관련된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92년 명예의 전당에서 J.G.테일러 스핑크 상을 수상한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야구를 예술적 과학, 육체보다 정신이 우선되는 스포츠로 분석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야구팬들에게 던진 첫번째 메세지는 타격에서의 공포다. 강속구로 날아오는 공과 대면해야하는 타석에서의 공포야말로 야구를 설명하는 첫번째 화두라고 설명한다.


타자는 지름 2.896인치(7.29cm)의 공을 가장 굵은 부분이 2.75인치(7.0cm)를 넘어서는 안되는 배트로 0.5초 이내에 도달하는 공을 0.25초 이내에 칠것인지 말것인지 타격 결정을 해야한다. 안타를 치기 위해선 배트가 공의 중심으로부터 1.2cm이상 빗나가지 않도록 접근해야하며 혹시 몸쪽으로 날아들면 피할 수 있는 준비도 갖추어야 한다. 공포를 무릅쓰고, 과학적 논리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타격이 이뤄지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다. 심지어 살인적인 강속구를 멀리 담장 밖으로 넘겨버리는 상황이 구장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타자였던 스탠 뮤지얼은 생애 통산 타율이 고작 0.331이었다. 저자는 아무리 뛰어난 타자, 허접한 투수라도 확률적으로, 통계적으로 세번 타석에서 두번은 반드시 죽는다고 담담히 말한다.


요컨대 야구 경기를 주도하는 자는 바로 투수다. 거의 직선으로 비행하는 직구(fastball), 타자로부터 멀리 아래쪽으로 꺽이는 커브, 느린 직구라고 할 수 있는 체인지업(change of pace), 직구와 커브의 중간형태 슬라이더, 역회전 커브인 스크루볼, 거의 회전하지 않고 홈플레이트에서 지랄같은 불규칙 변화를 일으키는 너클볼, 마지막 순간에 허무하게 뚝 떨어지는 싱커, 침이나 바셀린 등의 이물질을 발라서 던지는 더러운 스핏볼(속임수 투구) 등의 별별 구종이 다 있지만 대부분의 타자는 오직 두종류만 생각한다. 겁나 빠른 공(직구)과 느려터진 공(변화구).


저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로 1907년(19살) 메이저리그 무대에 등장해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활약한 존슨을 꼽았다. 그는 형편없는 팀에서 활동했지만 사이 영 다음으로 가장 많은 승수인 416승을 올렸다. 레너드 코페트가 존슨을 위대한 투수로 꼽은 이유는 위대한 성적도 있지만 인간미 있는 선수였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유격수의 결정적 에러로 싹쓸이 2루타를 맞았음에도 존슨은 오히려 에러를 범해 풀이 죽은 그를 팔로 얼싸 안으며 위로 해줬다고 한다. 참고로 존슨은 110개의 완봉승, 3,508개의 탈삼진, 56연속 이닝 무실점, 1:0의 완투승 서른여덟번, 3천이닝이 넘은 통산 방어율은 2.17이었다.


레너드 코페트는 타격과 피칭 외에도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요소로서 수비, 베이스 러닝, 감독, 사인, 벤치, 지명타자, 심판원, 구장 등을 분석했다. 그는 지극히 과학적인 법칙들이 적용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불확실성이야말로 날마다 치르는 야구를 재미있고 볼 만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감독을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찌질이로 만드는 원인이 바로 예측불허, 변화무쌍한 야구의 속성때문이다. 그는 구장 막후에서 벌어지는 요소인 미디어, 원정경기, 프런트, 스카우트, 통계, 기록, 구단주, 선수노조, 커미셔너, 에이전트 등을 낱낱이 파헤쳤다.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의 변화중에 부정적인 3대 요소로 인조 잔디, 무작위 구단 증설, 마이너리스 약화 등을 거론하고 반대로 3대 개선으로는 미디어 발달, 플레이오프 제도, 도루 부활 등을 뽑았다. 인조 잔디는 불규칙 바운드 등을 통한 부당한 안타를 유도하고 선수의 부상 위험도 야기한다. 구단 증설은 유능한 인재들을 여러 팀에 분산함으로써 메이저리그 전체를 하향평준화 시킨다고 보는듯하다. 이는 곧 마이너리스의 약화와도 관련있다. 탄탄한 기반을 갖지 않고선 훌륭한 메이저리그도 기대할 수 없다는 지론이다.


반대로 TV중계 기술의 발달은 야구팬들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기술적 안목도 많이 넓혀줬다. 특히 플레이오프 제도는 야구팬들에게 야구의 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보너스 선물이다. 경기에서 도루의 활성화는 홈런과 같은 장타 의존에서 벗어나 필드 플레이를 더욱 다이나믹하게 만들고 득점 루트의 다양화를 시도함으로서 팬들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노파심 섞인 레너드 코페트의 여러가지 걱정과 충고는 야구를 더욱 즐겁게 해주는 요소는 무엇이며 야구의 질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한국 야구에 대한 성찰도 유도한다.


150년이 넘은 미국야구는 그 역사만큼이나 풍성하고 기반도 튼튼하다. 프로야구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유지될 수 있다고 하지만 야구를 통해 얻는 즐거움 자체는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관계없는 오묘하고 신통방통한 즐거움이다. 선발 투수의 구질과 타자의 공략, 타자 스윙 시스템과 포수 사인,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수비 포지션, 주자의 베이스 러닝과 견제, 감독 성향, 심판마다 조금씩 다른 스트라이크 존, 구장마다 천차만별인 외야 길이와 펜스구조 및 파울존 ...야구 한게임에서 볼 수 있는 요소만도 수십, 수백가지이며 순간순간 별의별 요소가 개입된다. 결정적인 순간 투수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 구장 위를 맴도는바람의 변화에 따라 게임이 결판날 수도 있다. 야구는 육체를 움직이는 과학적 스포츠이자 비과학적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멘탈(mental) 스포츠이며,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속단할 수 없는 카오스(chaos) 그 자체다. 그래서 우리는 야구를 예술이라 부른다.


★재밌는 구절

구든은 클레멘스에게 직구를 던졌다. '구든'의 직구를 클레멘스는 포수 게리 카터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저 친구가 던진 공이 내가 던지는 것만큼 빠릅니까?" 이는 곧 '나도 저만큼 빠른 공을 던지는가요"라는 물음이었다. "그야 물론이지" 그러자 클레멘스는 혼자 생각했다. 저토록 빠른 공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쳐댈 수 없다. 타석에서 빠른 직구의 위력을 스스로 체험해 본 그는 그 뒤 정교한 투구배합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빠른 직구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 (81페이지)


임종 직전의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이 애브너 더블데이 장군을 불렀다. "여보게 야구를 꼭 살리게. 이 나라에선 언젠가 그게 필요하게 될 거야" 필자는 누군가가 야구 당국 관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으면 싶다. "야구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 하시게. 언젠가 필요하게 될 게 아니고 매일, 지금 당장 필요한 거니까" 자, 우리끼리도 지금 당장 야구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61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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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2009, 이상.

어릴적 해태 타이거즈 팬으로서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수많은 실화(Facts)들을 다시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 설레이며 읽었다.

프로야구 원년(82년) 타점왕에 10승 1세이브까지 기록한 만능 야구선수 김성한, 한국 프로야구 최초 노히트 노런의 방수원, 무한질주 도루왕 김일권, 핵폭탄 이상윤, 탱크 김무종(포수), 홈런왕 김봉연, 까치 김정수, 특급잠수함 이강철,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 해결사 한대화, 싸움닭 조계현,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 바람의 아들 이종범 등등.

야구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는 쇼킹 플레이를 밥먹듯이 하며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해태 타이거즈는 당시 모든 야구팬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전설적인 야구팀이다. 97년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해태제과가 도산나면서 구단의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스타급 선수들을 LG, 삼성 등으로 무더기로 팔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버렸고, 결국 2001년 해태는 기아 타이거즈로 대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해태 타이거즈의 강한 매력 중의 하나는 열악한 재정, 허접한 라인업(얇은 선수층)으로도 무서운 파이팅 정신을 통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무려 아홉 차례나 거머쥐었다는 믿을 수 없는 업적과 주기적으로 초호화 메이저리그급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것.

설령 정규시즌 1위를 못해도 죽기살기로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탄탄한 재정과 두터운 선수 층으로 무장한 삼성, LG, 한화 같은 강팀들을 물먹이며 결국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는 깡다구 정신의 구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해태 타이거즈 야구는 아드레날린을 무작위로 분출시키고,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이성을 마비시킴으로써 결국 미친놈으로 변신케 하는 달콤한 악마의 야구였다.

한편, 3일에 한번씩 등판해 무조건 완투를 해야했던 이상윤, 투수가 부족하거나 부상당하면 1루 보던 김성한이 투수 포지션을 맡고, 유격수 이종범이 뜬금없이 포수를 보는 것 등의 기이한 행태는 타이거즈 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에서도 종종 볼 수 있었던 비정상적인 작태였다. 하지만 선수층이 얇은 해태 타이거즈는 이런 작태가 유난히 심했다.

프로 선수들에 대한 무자비한 혹사, 비인격적 대우 등 부조리한 현상들은 예전에 비해 많이 없어졌지만 승리에만 집착하거나 돈에 눈이 어두워 프로 정신을 망각하는 현상은 아직도 여전하다. 돈많은 일부 구단이 저지르고 있는 무차별 스카우트와 자유계약(FA)의 부정적 현상도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저자의 말처럼 프로야구는 국민소득 2만불은 되어야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고급 스포츠이고 한국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너무 일찍 출발했다. 형편없는 인프라와 재정구조, 비정상적인 선수 로테이션, 구단과 선수 간 계약에서의 불공정 작태, 지역연고와 관계된 부정적인 지역주의 등등.

전라남도 광주를 연고로 출발한 해태타이거즈와 오랫동안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았던 전라도를, 특히 정치인 김대중을 서로 연결했다는 시도 자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광주, 전남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울분을 무등 야구장에서 풀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응원가로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남행열차'가 울려 퍼지는 무등야구장의 서글픈 신바람은 기아 타이거즈로 바뀐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인상깊은 구절

전두환에서 노태우를 거쳐 김영삼까지, 정권은 해마다 5월 18일(광주민주화항쟁기념일) 광주에서 야구가 치러질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원정경기에서마다 해태 타이거즈는 해마다 승전보를 보내며 '그날'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1983년부터 9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는 5월 18일 경기에서 7승 무패를 기록했다)...(중략)...

몇몇 대학생들은 굳이 중계석 옆쪽 자리로 파고들어 '오월의 노래'(민중가요)를 합창하다가 뒤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군중 속으로 숨바꼭질하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목이 터져라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환호하고, 기뻐서 그리고 한스러워 눈물을 흘렸고 부둥켜 안았다. '김대중'은 꺽인 현실의 날개였지만, 무등 야구장의 '해태타이거즈'는 날아오르는 희열이었고 모든 희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본문 126~127페이지)

그리고 혹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의욕을 가끔 부린 것은, 단 한번 기회만 주어진다면 악전고투 끝에 4등으로 올라가 3등, 2등, 1등 팀을 차례로 잡아내고 우승하던 해태처럼 기어이 한 건 해낼 수도 있는 것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 길에서 나의 패배와 불안을 위로하는 것은 '삼미 슈퍼스타즈'였으며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기껏 해태 타이거즈였다.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기억으로 못난 나 자신을 용서하며 감싸안았고,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으로 이를 악물고 보다 높은 곳을 꿈꾸며 걸었다. (본문 251~252페이지)

그래서 꼴찌 팀 삼미의 옛 팬으로서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번 물어뜯을 수 있다는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본문 253~254페이지)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 8점
김은식 지음/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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