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르샤바 1944(Miasto 44, Warsaw 44, 2014) 
△감독: 얀 코마사
 
≪바르샤바 1944≫는 1939년부터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인들이 1944년 수도 바르샤바에서 일으킨 무장 봉기를 다루고 있다. 수많은 폴란드 젊은이들이 참여한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가 1989년 민주화 운동을 통해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실패로 끝난 폴란드 무장 봉기는 1936~39년 진행된 스페인 내전의 흐름과 비슷해 보인다.  독재자 프랑코와 공화파(인민전선)의 대결 속에 소련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어정쩡한 노선은  폴란드 봉기군을 지원하기로 했던 연합군과 스탈린의 행보와 엇비슷하다. 당시 폴란드 무장봉기 동안 수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독일 나치군로부터 방화와 약탈, 강간,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요컨대, 비극으로 끝나버린 저항, 자유를 향한 투쟁을 다룬 ≪바르샤바 1944≫는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민병대들의 삶을 그린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1995≫과 겹치는 코드가 많아 보인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주인공 데이빗과 블랑카의 슬픈 로맨스는 ≪바르샤바 1944≫에서 반나치 저항군에 동참한 스테판(요제프 파블로프스키)과 알라(소피아 비츨라츠)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와 견줄만하다. 

≪랜드 앤 프리덤≫의 전투씬은 상징적인, 소소한 수준에서 그쳤음에도 철학적 담론, 자유를 향한 위대한 정신을 다양한 미장센과 뛰어난 연출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반면, ≪바르샤바 1944≫에서 묘사되는 치열한 시가전과 전쟁의 참담함은 몸서리 칠만큼 사실적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물량 투입에도 불구하고 제2차 대전 전투를 가장 리얼하게 표현한 ≪에너미 앳 더 게이트, Enemy at the Gates≫에는 미치지 못한 듯하다. 

한편으론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전개되는 초현실주의적, 몽환적 컨셉은 낯설음으로 다가온다.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아비규환의 전투현장에서 주인공 스테판과 알라의 키스씬은 이 영화를 대표하는 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터가 아닌 마치 야외무대에서 춤추는 댄서처럼, 감미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슬로우모션으로 펼쳐지는 전쟁미학은 ≪랜드 앤 프리덤≫이 보여준 유머나 풍자에 비해 조금은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리얼리즘이라는 재료로 감동의 맛을 선사하기 위해 추가하는 낭만주의의 양념이 너무 지나치면 원재료가 갖는 고유의 미감을 희석시키는 소지도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관점으로 봤을 때, 제노사이드라고 할만큼 집단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비극적인 역사를 낭만적 예술감각으로 승화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때론 예술은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제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블록버스터급 폴란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느끼기는 데에 있어 120여분의 러닝타임이 오히려 짧은 느낌이다. 지루하지 않는 속도감을 보여주었고,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리드미컬한 연출과 진한 향기를 발산하는 배우들의 눈빛 연기가 여운으로 남는 작품이다.


[바르샤바 1944 예고편]


바르샤바 1944

Warsaw 44 
9.3
감독
얀 코마사
출연
요제프 파블로프스키, 막스 리멜트, 모니카 크비아트코브스카, 안나 프루흐니악, 토마시 슈츠하르트
정보
전쟁, 드라마 | 폴란드 | 125 분 | -
글쓴이 평점  

Posted by 아나키안

△영화: 비스트(The Beast of War, 1988)

△감독: 케빈 레이놀즈


시대가 변하면 악당도 바껴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된 베트남전쟁과 1979년 12월 소련이 전격 단행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냉전시대를 주름잡았던 두 강대국이 주도한 전쟁이라는 점,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모두 철수했다는 점 등에서 유사성이 많다. 


초강대국 미국이 패배한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소비에트 연방-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작품은 상대적으로 많진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베스터 스탤론의 《람보》 시리즈는 두 전쟁을 모두 다루는, 넓은 오지랖을 과시한다. 

▲람보3 포스터.


1988년 개봉한 《람보3》와 《비스트, The Beast of War》는 아프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포커스는 사뭇 달라 보인다. 두 작품 모두 전쟁의 잔혹함을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람보》가 액션, 활극 요소가 강한 반면에 《비스트》는 전쟁의 비인간성에 좀 더 강조점을 둔 것 같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악당으로 소련장교가 등장하는데, 무고한 아프간 주민들을 죽이고 마을을 파괴하는 학살자로 그려진다. 


《람보3》에서 말 타며 화염병으로 탱크를 무력화시키고 화살로 헬기를 박살내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활약은 거의 초인의 경지와 다름없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해 지하드(성전)를 벌인 의용군 ‘무자헤딘’은 미국의 지원을 암암리 받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자헤딘에는 21세기 초입에 발생한 최악의 사건 9.11테러(2001년)의 배후로 지목되는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도 있었다.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답게 《람보3》와 《비스트》에 등장하는 소련장교는 전쟁에 미친 살인마 캐릭터다. 흥미로운 건 소련과 맞짱 뜬 아프간 반란군(무자헤딘)이 극악무도한 골리앗(소련)에 대항에 싸우는 다윗마냥 매우 긍정적으로, 그야말로 성(聖)스럽게 묘사됐다는 점이다. 이들 작품에서 아프간 게릴라들은 소총 한 자루로 소련 기갑부대와 맞서 싸우는 숭고한 투사로 그려지고 있어 지금 시점에서 볼 때면 기분이 이상야릇하다. 


더욱이 《비스트》에서 아프간 반군 지도자인 타이(스티븐 바우어)는 소련의 탱크 지휘관 다스칼(조지 준쥬)로부터 버림을 당한 소련군 병사 코버첸코(제이슨 패트릭)를 포용하는 것도 모자라 동족을 잔혹하게 죽인 다스칼 일행을 살려서 돌려보내는 똘레랑스까지 발휘한다. 알카에다를 섬멸하고자 미국이 최근까지 아프간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른 사실을 고려한다면 역사는 실로 부조리의 연속인 듯하다. 

1980년대에는 아프간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소련이 악이었다면, 지금은 지하드라는 명분으로 테러를 서슴지 않는 무장 이슬람 세력이 악의 축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냉전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신자유주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반면에,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할리우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냉전시대를 거쳐 문명충돌 이후에는 또 어떤 악이 탄생할까?


영화 《비스트》를 보며 언뜻 《연평해전》이 뇌리를 스쳤다. 비평의 각도, 제작취지, 시대정신 등에 따라 《연평해전》이라는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아직도 한반도 사람들은 ‘문명의 충돌’도 아닌 《람보》 시리즈가 풍미하는 ‘냉전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연평해전 포스터.


때론 전쟁영화에서 드러나는 휴머니즘이 실제 전쟁터에서 체감할 수 있는 휴머니즘인지, 또한 휴머니즘에도 보편성과 특수성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진짜 휴머니즘이라면 시대와 이념을 초월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느끼는 휴머니즘과 가슴 벅찬 감동이 시간이 흐른 후, 촌스러운 람보나 우스꽝스러운 똘이장군을 다시 볼 때처럼 민망함으로 변하지 않길 바란다. 


탱크 지휘관 다스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나치에 맞선 영웅이었으나, 아프간 전쟁에선 학살자와 다름없는 미치광이다. 이처럼 아무리 목적이 숭고하더라도 전쟁은 본질적으로 모순 덩어리이며 부조리의 총체. 또, 그 취지가 선하고 내용이 아무리 철학적이더라도 전쟁을 다룬 영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필연적으로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숙명을 가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예고편]


비스트

The Beast of War 
8.9
감독
케빈 레이놀즈
출연
조지 준쥬, 제이슨 패트릭, 스티븐 바우어, 스티븐 볼드윈, 돈 하비
정보
전쟁, 드라마 | 미국 | 111 분 | -
글쓴이 평점  

Posted by 아나키안

△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2001)

△ 감독: 장-자끄 아노(Jean-Jacques Annaud)


2차 세계대전의 완벽한 미장센

 

게임을 영화로 리메이크한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Enemy at the Gates》는 유명 FPS게임 《콜 오브 듀티》가 오마주할 정도로 강력한 임팩트를 남긴 전쟁영화다. 그만큼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장센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각국이 제작에 참여한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세계전쟁사에 큰 획을 그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이 전투는 1942년 8월21일부터 1943년 2월2일까지 당시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 소련군과 독일 나치군 간에 벌어졌고 결국 소련이 승리를 거뒀다.


소련과 미국의 스나이퍼… ‘바실리’와 ‘카일’


실존했던 스나이퍼(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배우: 주드 로)의 활약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 2014》에서 전쟁영웅으로 등장하는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과 묘하게 중첩된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가 강력한 화력을 갖춘 나치에 승리를 거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상징하는 인물 ‘바실리’를 그려냈다면,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라크전쟁에서 전설로 불리는 네이비실 저격수 ‘크리스 카일’을 고독한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쟁의 참상, 부조리보다는 고독한 영웅을 부각시켰다고 평가한다.


소련의 인민영웅 바실리와 미국의 자유주의 수호자 카일은 스나이퍼라는 공통점 외에도 전장에서 발군의 활약을 통해 아군의 생명을 지켜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히어로이다. 물론 바실리는 소련의 선전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와 흐루시초프(밥 호스킨스)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일 수도 있다. 바실리 역시 이에 대한 과대선전에 부담을 느끼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반면, 아메리칸 영웅 카일은 치열한 전장과 평온한 일상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분열적’ 존재성을 드러낸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바실리와 타냐(레이첼 웨이즈)의 뜨거운 로맨스는 저격수들의 대결만큼이나 흥미롭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영웅주의 코드를 갖고 있음에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영웅의 이면에 숨겨진 피폐화된 개인의 존엄과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광기로 얼룩진 전쟁의 잔혹함과 몰인간성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도 전장 속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사랑과 질투로 인한 비극 등을 섬세한 감정선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긴장감 넘치는 총격(저격) 장면에 숨죽이며 몰입하도록 만든다.


굳이 비교하자면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전쟁 속 로맨스를 그려낸 킹 비더(King Vidor) 감독의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1956》에 가깝고,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전쟁의 실상을 현실감 있게 고발했다는 점에서 올리버 스톤 감독의 《7월 4일생, Born on the Fourth of July, 1989》과 매칭이 되는 것 같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면면히 흐르는 이데올로기는 단연코 마초이즘이다. 이는 할리우드 전쟁영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비슷한 전쟁영화, 스나이퍼 소재의 영화임에도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는 그러한 마초이즘은 보드카를 홀짝이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흐루시초프의 캐릭터에서나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영웅주의보다는 로맨스에 기울어져 있어 오히려 가슴에 와 닿는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고뇌하고 갈등하는 개인이 드러나 있지만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등의 명작과 비교한다면 아무래도 숭고한(!) 영웅주의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는 소비에트의 붉은깃발을 연상하기 힘들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거칠게 펄럭이는 성조기가 어른거린다. 쉽게 말해 러시아의 바실리가 낭만적인 투사에 가깝다면, 미국의 카일은 서부의 고독한 총잡이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예고편]


에너미 앳 더 게이트 (2001)

Enemy at the Gates 
9
감독
장-자끄 아노
출연
주드 로, 조셉 파인즈, 레이첼 웨이즈, 밥 호스킨스, 에드 해리스
정보
액션, 전쟁 | 독일, 영국, 아일랜드, 미국 | 131 분 | 2001-05-19
글쓴이 평점  

Posted by 아나키안

대의명분으로 포장된 더러운 전쟁


전쟁영화 중에서도 어느 정도의 수준 이상을 보여준 작품들을 임의대로 분석한다면 3~4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처럼 전쟁의 광기와 참상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 《블랙 호크 다운》,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극한의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부각시키는 작품. 《퓨리》, 《아메리칸 스나이퍼》처럼 독보적인 영웅에 방점을 찍은 작품. 마지막으로 이도 저도 아닌 오직 화려한 액션에 모든 물량을 투입한 블록버스터… 물론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든 영웅은 꼭 등장할 수밖에 없는게 전쟁영화의 숙명처럼 보인다.


한편으론,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국가의 대립구도처럼 선과 악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한 작품들이 높은 평점을 받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반면, 지옥 속 아귀다툼 같은 전쟁의 참상이 권력투쟁(헤게모니 쟁탈전), 정치판의 연속이며 대내외에 내건 전쟁의 명분이 실제론 허상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보여준 작품들은 높은 평가를 받은 경우가 흔하다. 베트남 전쟁처럼 이데올로기 대립과 무의미한 희생, 중동전쟁처럼 경제적 이익을 보편적 대의명분으로 포장한 추악한 전쟁 등이 그 단골 주제이다. 



기자 출신답게 고발성이 짙은 작품들을 제작해 주목을 받았던 폴 그린그래스 감독. 그가 감독을 맡고 맷 데이먼이 주연한 《그린존(Green Zone)》은 허울뿐인 명분(대량살상무기 제거 및 세계평화 유지)을 만들고 사실을 조작해 전쟁을 감행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적이 없으면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라도 무한전쟁을 지속하고자 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꼬집고 있다. 그러한 세계전략의 배후에는 군사, 금융, 자원(석유), 식량이라는 4가지 핵심가치를 장악하고자 하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숨어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영화 제목 ‘그린존’은 2003년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Freedom of Iraq)를 위해 파견된 미군의 진짜 정체를 까발리는 가장 효과적인 아이템으로 보인다. ‘그린존’은 후세인 정권 붕괴 뒤 그가 사용하던 바그다드 궁을 개조한 미군의 특별 경계구역. 미군 사령부 및 이라크 정부청사가 자리한 전쟁터 속 안전지대를 가리킨다. 폐허가 돼버려 물과 식량이 부족한 바그다드와는 달리 고급수영장과 호화식당, 클럽들이 들어선 그린존은 이라크 전쟁의 아이러니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린존》은 미 국방부의 숨은 음모 외에도 언론의 사명을 저버린 기자들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월스트리트저널 여기자는 고위관료가 제공한 근거가 불확실한 정보를 기사로 내보내 전쟁의 명분을 확고히 하고 이라크 침공을 용인한 공범자와 다름없다. 비판의식 없이 주는대로 받아 적고, 특종에 눈 먼 언론들의 작태를 고발하고 있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처럼 비록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그린존》은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도 이라크 전쟁의 숨겨진 음모를 고발하고자 하는 치밀한 연출력이 돋보인 작품이다.


앞서 얘기했듯 장르의 특성상, 전쟁영화의 여러 가지 유형 속에는 크든 작든 히어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린존》에서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 역시 이라크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전쟁 영웅들과 차원적으로 다른 이유는 총 잘 쏘고 사람 잘 죽이는 ‘카우보이’여서가 아니라 더러운 전쟁의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는 정직한 군인이기 때문이다.  


[예고편]


그린존 (2010)

Green Zone 
7.9
감독
폴 그린그래스
출연
맷 데이먼, 그렉 키니어, 브렌든 글리슨, 에이미 라이언, 칼리드 압달라
정보
액션, 스릴러 | 프랑스, 미국, 스페인, 영국 | 115 분 | 2010-03-25
글쓴이 평점  

Posted by 아나키안

-영화: 워하우스(Warhouse, 2013, 영국)

-감독: 루크 마세이(Luke Massey)


어느 날 아침, 영국 해병대원 A.J 버드(배우: Joseph Morgan)는 일어나 보니 자신이 이상한 집에 갇히게 된 것을 깨닫는다. 더구나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인간이 아닌 괴물에 가까운 미지의 존재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탈출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별 짓을 다해도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똑같은 식사가 제공되고 모든 것이 원상복구 되는 악순환 속에서 버드는 점점 광폭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에 살았던 군인 에드워드 스털링(배우: Matt Ryan)이 쓴 수첩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이곳에서 30년 넘게 살았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결코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 지하에 굴을 파서 나가려고 했으나 밖의 세상이 너무 잔혹해 나갈 수 없었다는 좌절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최후의 결단 등을 읽게 되지만 버드는 더욱 탈출의지를 불태운다. 


폐쇄적인 공간에 이유도 없이 갇히게 된 설정은 영화 <큐브>와 비슷하나 여러 명이 아니라 혼자서 일반 가정집에 갇혔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올드보이>와 더 맞는 듯 하다. 하지만 올드보이는 리얼리즘 요소가 강한 스릴러인데 반해 워하우스는 판타지 공포물에 가까운 스릴러다.



매일 똑같은 식사와 똑같은 위협들, 반복되는 구속생활에서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해 밖으로 나가는 지하 문을 가까스로 찾지만 밖의 세상은 갇힌 이곳보다 더 잔혹한 지옥세계와 다름없었다. 결국,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무의미한 도전이었다는 컨셉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워하우스를 보며 생뚱맞게 ‘아라키 테츠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이 연상됐다. 끊임없는 거인의 위협 속에서 성 밖으로 과감히 나가야 한다는 도전적인 부류와 성벽만이 인류를 구제하는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갈등은 각자 존재 내면에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악으로 규정된 거인이나 괴물이 바로 ‘나’라는 존재 속에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과 밖의 지옥세계에 기여했던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설정은 선과 악, 피아(彼我)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그 경계를 해체하는 시도로 보인다. 


A.J 버드가 매일 목숨 걸고 대결한 괴물은 바로 자신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즉 나의 본질과 대면하는 상징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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